posted by Belle〃♬ 2017. 1. 11. 20:04

경찰의 6·6 반민특위 습격


1949년 5월 20일, 반민특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소장파 의원인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5월 23일 열린 임시국회에서는 구속 의원의 석방결의안을 놓고 이틀간의 격론을 벌였지만 이미 국회가 크게 외축된 탓에 88 대 95로 부결되고 말았다. 국회에서 구속 의원의 석방안이 토의되고 있는 동안에 서울 시내에서는 "국회 내의 빨갱이를 추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는 관제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석방동의안이 부결된 뒤에도 찬성표를 던진 88명의 의원에게 친일세력의 공격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친일세력은 5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민중대회'라는 집회는 열고, 구속 의원의 석방결의안에 찬성한 88명의 국회의원을 공산당이라고 몰아붙였다.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는 관제데모를 주동하면서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악선전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운하와 종로서 사찰과 주임이 6월 4일 특위 특경대에 반민 피의자로 체포되었다. 마포서장은 반민특위를 방문해 이들을 선처해 달라고 했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했다. 시경 사찰과 직원들은 이승만에게 48시간 안에 반민특위의 특경대를 해산시켜 달라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


그 요구는 이승만이 자기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경찰 간부들은 실력행사를 하기로 모의하고 내무차관 장경근의 허락까지 얻어냈다. 장경근은 이승만의 사전 양해가 있었음을 암시했다.


1949년 6월 6일 중부경찰서장을 윤기병이 지휘하는 무장경찰이 특경대원을 비롯해 반민특위 요원 35명을 체포해 수감하는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무기는 물론이고 피의자를 심문한 내용이 담긴 서류 등을 모두 압수해 버렸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경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자행되었으며, 반민특위 요원들은 경찰서에 감금되어 심한 가혹행위를 받았다. 국회의장 신익희를 중심으로 다섯 명의 국회의원들이 이승만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승만으로부터 "특경대 해산은 내가 지시했다"는 말만 듣고 물러났다.


이승만은 그런 지시를 내리기 전에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필동 3가에 있는 관사에 살고 있던 김상덕의 아들 김정육의 증언이다.


"이승만이 극비리에 왔습니다. 아버님은 우리에게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당시 경호대가 우리 집에 와 있었는데 경무대 사람들이 와서 이들 대신 호위를 했어요. 이승만은 아버님과 응접실에서 담판을 했습니다. 후에 들으니 그때 아버님이 이승만의 요청에 불응했다고 하더군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주대낮에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터졌습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탕


특경대 해산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어 국회는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국회는 찬성 89표, 반대 59표로 그 요구안을 통과시켰지만, 결국 특위와 친일 경찰 측은 구속한 사람들을 서로 교환 석방하는 선에서 마무리한다는 정치적 협상을 하고 말았다. 이로써 친일 경찰은 석방되고, 반민특위는 기세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와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국회 프락치 사건이었다. 재탕, 그럿도 확대된 재탕이었다. 6월 20일부터는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약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김병회 등의 국회의원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역시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증거는 없었으며, '조작'의 냄새가 짙은 사건이었다.


노일환 등 소장파 의원 46명이 48년 10월 13일 '외국군 철수 긴급동의안'을 내놓은 것까지 문제삼았다. 아니 바로 그것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는 핵심적인 증거가 되었다.


체포된 의원들이 제헌국회에서 맹활약할 수 있었던건 그들의 전력이 전혀 문제될 게 없었으며 든든한 우익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5월 20일에 체포된 이문원은 한독당원이자 대동청년단원, 노일환은 일제 때부터 『동아일보』 기자 등으로 활약한 호남 지주 출신의 한민당원, 박윤원은 광복청년단 지방간부, 강욱중은 민족청년단원, 김병회는 독립촉성국민회원, 김약수는 한민당 간부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혹독한 구문이 가해졌지만, 증거는 없었다. 증거랍시고 제시된 건 한 여간첩의 음부에서 빼낸 문건이라는 건데 그 문건의 내용은 신문 기사 수준의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여간첩은 법정에 나타나지도 않아 그 존재조차 의문시되었으며, 이에 대해 검찰총장 권승렬은 국회에서 횡설수설했다. 모든 게 그야말로 '코미디 수준' 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