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15. 00:32

군경 조직의 강화


군 내부의 숙군(肅軍) 바람은 국가보안법이 조장한 사회적 분위기에 자극되어 더욱 거세졌다. 그 분위기를 타고 1949년 1월 2일 육군정보국에 특별수사과 및 그 예하의 15개 지역파견대를 설치하였고, 1949년 10월 21에는 육군특무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렇게 압박이 조여 오는 만큼 좌익계 군인들의 반란 및 퇴출 시도도 잇따랐다. 국가보안법이 공포된 다음날인 1948년 12월 2일에는 대구 6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관련자 590명이 체포되었다. 49년 전반기엔 육군 대대장(소령) 2명이 47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월북했으며, 공군 조종사 2명은 비행기를 타고 월북했는가 하면, 해상에서는 좌익인사들이 해군 함장과 미국 상선을 납치해 월북하는 사건들이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기존의 군과 경찰력 강화 프로그램을 더욱 강화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47년 말 경비대는 1만 7천 명 수준이었으나 48년 여름에는 5만 명, 49년 초엔 6만 5천 명으로 증강되었다. 이제 더이상 경비대는 아니었다.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국군에 편입됐고, 9월 5일에 각기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1월 30일 국군조직법이 공포된 뒤 12월 15일 국군이 정식 법제회되었기 때문이다. 경찰력도 47년 7~8월에 2만 8천 명 수준이었으나 48년 초 3만 명, 49년 3월에는 4만 5천 명으로 증강되었다.




"광무신문지법은 유효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까지 해방정국의 언론계엔 좌우 갈등이 치열했고 그 와중에서 테러도 난무했지만, 이제 국가보안법 체제하에선 그런 갈등은 먼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이미 정부 수립 일주일 전인 8월 9일 미 군정청 정무부장 조병옥을 통해 일제 시대의 언론통제법인 '광무신문지법'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구 후 9월 3일 『부산일보』의 간부와 기자를 신문지법과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9월 13일 『제일신문』의 간부사원 10여 명 검거, 9월 15일 『조선중앙일보』의 간부들 검거, 9월 18일 『세계일보』의 간부 7명 검거와 함께 세 신문이 정간을 당하는 사건들이 있었다. 이제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성일보』 등 4대 우익지들이 주류 언론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러나 우익 신문들도 더 이상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우익지들은 친여지, 친야지로 분류되었으며, 친야지는 새로운 탄압을 각오해야 했다.


9월 22일 7개항의 언론단속 지침이 발표되었다. 이 지침은 대한민국의 국시와 정부 시책을 위반하는 기사, 정부를 모략하는 기사, 공산당과 이북 북괴정권을 인정하거나 비호하는 기사,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기사 등의 게재를 금지시켰다.


이 7개 조항 지침도 큰 문제였지만, 12월 1일에 공포된 국가보안법은 언론의 자유를 더 위축시켰다. 49년 5월까지 7개 일간지와 1개 통신사가 폐간 및 폐쇄당했으며, 많은 기자들이 체포되었고 발행인 및 편집자들이 제거되었다.


방송은 아예 정부의 산하로 들어가 국영방송이 되었다. 미군정은 1948년 6월 1일 방송국을 조선방송협회에 돌려주었으며, 조선방송협회는 8월 6일 대한방송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다음날 8월 7일 국회를 통과한 정부조직법에서 방송국이 정부의 하부 조직으로 흡수돼 '대한민국 공보처 방송국'으로 국영화되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3. 14:45

국가보안법 찬반 논쟁


여순사건이 거의 진압되어 가던 1948년 9월 29일 잠자코 있던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다시 등장하여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은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아주 모호해서 정권이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다.


국회에선 한반 논쟁이 벌어졌다. 

야당 국회의원 조현영은 이렇게 말했다.


"속담에 고양이가 쥐를 못 잡고 씨암탉을 잡는다는 격으로 이 법률을 발표하고 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 일본놈 시대와 같이 잡아다 물 먹이고 이놈 자식이 그랬지 하면 예예 그랬습니다. 이래서 거기 다 걸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정치적 행동 하는 사람은 다 걸려 들어갈 수 있는 이런 위험도 있으니까 우리가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약을 꼭 써야 하면 분량을 맞추어서 써야 하는데 이 법안은 분량이 맞지 않습니다."


김옥주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보안법은 포악무도한 일제 침략주의의 흉검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유지법과 똑같은 비민주적 제국주의 잔재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는 이 마당에 ······ 제국주의 잔재 폐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반면 찬성파인 박순석은 "농사짓는 농민은 피를 압니다. 피를 한 포기 뽑자면 나락을 다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피를 안 뽑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주장했다.


법무장관 권승렬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건국을 방해하는 사람하고 건국을 유지하려는 사람하고 총·칼이 왔다갔다하고 하루에 피를 많이 흘립니다. 즉 국가보안법은 총하고 탄환입니다. ······ 이것은 물론 평화 시기의 법안은 아닙니다. 비상시기의 비상조치니까 이런 경우에 인권옹호상 조금 손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가불 건국에 이바지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11월 14일자 사설 <국가보안법을 배격함>은 국가보안법이 "크게 우려할 악법이 될 것"이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捕殺)해야 돼"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연합에 의하여 1948년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되었다. 이제 통일 논의 자체가 어럽게 되었다. 북측에 무엇을 제안한다거나 남북회담을 하자거나 합작을 하자는 것도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가장 원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당시 법무부 검찰국 초대 검찰과장 겸 고검 검사로서 '빨갱이 잡는 검사'로 이름을 날린 선우종원에게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捕殺)해야 돼"라고 격려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장택상이 즐겨 던지던 질문이 하나 있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세 사람이 누군지 아나?" 답은 "이승만, 나 그리고 김두한이야"였다. '빨갱이 사냥'에 있어서 세 사람은 상중하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진 삼위일체였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곧 괴력을 발휘하였다. 외무장관 장택상이 유엔한국위원단에게 제시한 통계에 따르면, 1949년 4월까지 국가보안법으로만 체포된 숫자는 8만 9천700여 명이었다. 49년 한 해에만 체포된 인원은 11만 명 이상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2. 18:55

반민특위의 와해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한 조사는 철저한 보안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3개월간 지속된 심리에서 국회의원들은 최고 10년에서 최하 3년까지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실형을 살던 중 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모두 석방되었다. 이후 이들은 대부분 북한으로 올라갔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그들이 '남로당 프락치'였다는 정부 측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로 쓰이고 말았다.


이에 대해 박원순은 "그렇게 학대받고 매도당한 조국, 대한민국에 계속 남아 있으라는 요구를 어떻게 그들에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들이 북한에서 대부분 강제노동소로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들은 양쪽의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분단의 피해자들이다"라고 말했다.


7월 2일, 이승만 정부와 친일세력은 1950년 6월 20일로 규정한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로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했고, 이는 논란 끝에 통과되었다. 7월 7일 반민특위 전원이 사임서를 제출했다. 당시 특위 위원장이었던 김상덕은 "공소시효가 단축되어 앞으로 50일 밖에 남지 않은 동안에 남은 반민자를 처벌할 자신이 없어 사표를 낸다"고 말했다.


반민특위는 49년 8월 22일 국회에서 폐지안이 통과됨으로써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반민특위는 출발 당시 반민자 7천여 명을 파악해 놓고 있었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조사 건수는 총 682건에 그쳤다. 이 가운데 체포 305건, 미체포 173건, 자수 61건, 영장 취소 30건, 검찰 송치가 559건이었다. 이 중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것은 221건이고, 특별재판부가 재판을 종결한 것은 불과 38건에 지나지 않았다. 불기소된 사람들은 대부분 무죄로 풀려났으며, 기소된 사람들 중에서도 실제 처벌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반민특위가 실패로 돌아간 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와의 유착 때문이었다. 이는 그것이 너무 늦게 시작되었다는 데에도 있었다. 해방 후 3년여가 지난 시점에선 이미 친일파가 막강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현실엔 김구와 한독당도 일조했다. 서중석은 "김구·한독당은 보수적 우익세력이기 때문에도 그런점이 있었고, 이승만·한민당과 합작하기 위해서도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르지만, 친일파 처단에 소극적이었다"며, "김구가 친일파를 우익을 더럽히는 군더더기로 비유하고 한민당을 신랄히 비판한 것은 1948년에 들어서였다"고 지적했다.




친일파 문제가 국민성에 미친 영향


그러나 그땐 이미 친일파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때였다. 친일파에게 대한 응징만이 능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친일파들이 사회 각계 권력의 핵심부에 여전히 포진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고 하는 점이었다.


반민특위 제1조사장 이병홍의 증언이다.

"친일 거두의 집에서 흔히 일본 황제의 사진이 벽상에 조심스럽게 걸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소위 교육칙어란 것을 가보처럼 모시어 둔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우리들을 적지 않게 놀라게 하였다. ······ 그리고 어떠한 자는 태연하게 우리들 앞에서 이완용의 위대한 민족애를 강조하고 동상 건립의 필요를 역설까지 하였다. 어떤 자는 장차 우리들이 저들 앞에 심판받을 날이 불원할 것을 오연(傲然)히 말했다. ······ 이러한 사상의 소유자가 1949년대의 한국에 한 개의 거대한 세력으로 남아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 친일파 문제가 향후 한국 엘리트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극단적 이기주의, 그것을 국가의 이익인 양 속이는 기만, 그리고 그걸 멀리서 바라보다 체념하고 마는 민중의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고은의 <이종형>이라는 제목의 시는 그 풍경의 일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3·1운동 때 만세를 불렀다/파고다공원과/용산에서 만세를 불렀다/만세 끝/다음해부터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일제 밀정/만주 떠돌며/독림운동가 체포/독립운동 파괴공작에는/그가 있었다/명동촌 중학생들이/그를 처치하려다 미수에 그쳤다/해방 뒤 서울에 나타나/대동신문사 사장이 되었다/만주에서/독립운동가 15명 죽인 것을/일본군이 죽였다 했다/반민특위 투옥되어 유죄판결 받아싸/이승만이 석방시켰다/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참가/기름지게 애국자로 행세했다/제2대 민의원에 당선/연미복 입고 사진 찍었다/화신백화점 앞/새나라사진관 전시관을 차지했다/누구도 그 사진 전시대 유리창 깨지 않았다"


먼 훗날(2004년), 독립유공자 후손 10명 중 6명은 무직에 고졸 이하 '저소득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차라리 이때부터 하지도 못할 친일파 단죄보다는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에 대한 보상과 지원이나 법제화했더라면, 역사가 그렇게까지 뒤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1. 20:04

경찰의 6·6 반민특위 습격


1949년 5월 20일, 반민특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소장파 의원인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5월 23일 열린 임시국회에서는 구속 의원의 석방결의안을 놓고 이틀간의 격론을 벌였지만 이미 국회가 크게 외축된 탓에 88 대 95로 부결되고 말았다. 국회에서 구속 의원의 석방안이 토의되고 있는 동안에 서울 시내에서는 "국회 내의 빨갱이를 추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는 관제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석방동의안이 부결된 뒤에도 찬성표를 던진 88명의 의원에게 친일세력의 공격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친일세력은 5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민중대회'라는 집회는 열고, 구속 의원의 석방결의안에 찬성한 88명의 국회의원을 공산당이라고 몰아붙였다.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는 관제데모를 주동하면서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악선전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운하와 종로서 사찰과 주임이 6월 4일 특위 특경대에 반민 피의자로 체포되었다. 마포서장은 반민특위를 방문해 이들을 선처해 달라고 했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했다. 시경 사찰과 직원들은 이승만에게 48시간 안에 반민특위의 특경대를 해산시켜 달라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


그 요구는 이승만이 자기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경찰 간부들은 실력행사를 하기로 모의하고 내무차관 장경근의 허락까지 얻어냈다. 장경근은 이승만의 사전 양해가 있었음을 암시했다.


1949년 6월 6일 중부경찰서장을 윤기병이 지휘하는 무장경찰이 특경대원을 비롯해 반민특위 요원 35명을 체포해 수감하는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무기는 물론이고 피의자를 심문한 내용이 담긴 서류 등을 모두 압수해 버렸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경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자행되었으며, 반민특위 요원들은 경찰서에 감금되어 심한 가혹행위를 받았다. 국회의장 신익희를 중심으로 다섯 명의 국회의원들이 이승만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승만으로부터 "특경대 해산은 내가 지시했다"는 말만 듣고 물러났다.


이승만은 그런 지시를 내리기 전에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필동 3가에 있는 관사에 살고 있던 김상덕의 아들 김정육의 증언이다.


"이승만이 극비리에 왔습니다. 아버님은 우리에게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당시 경호대가 우리 집에 와 있었는데 경무대 사람들이 와서 이들 대신 호위를 했어요. 이승만은 아버님과 응접실에서 담판을 했습니다. 후에 들으니 그때 아버님이 이승만의 요청에 불응했다고 하더군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주대낮에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터졌습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탕


특경대 해산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어 국회는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국회는 찬성 89표, 반대 59표로 그 요구안을 통과시켰지만, 결국 특위와 친일 경찰 측은 구속한 사람들을 서로 교환 석방하는 선에서 마무리한다는 정치적 협상을 하고 말았다. 이로써 친일 경찰은 석방되고, 반민특위는 기세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와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국회 프락치 사건이었다. 재탕, 그럿도 확대된 재탕이었다. 6월 20일부터는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약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김병회 등의 국회의원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역시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증거는 없었으며, '조작'의 냄새가 짙은 사건이었다.


노일환 등 소장파 의원 46명이 48년 10월 13일 '외국군 철수 긴급동의안'을 내놓은 것까지 문제삼았다. 아니 바로 그것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는 핵심적인 증거가 되었다.


체포된 의원들이 제헌국회에서 맹활약할 수 있었던건 그들의 전력이 전혀 문제될 게 없었으며 든든한 우익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5월 20일에 체포된 이문원은 한독당원이자 대동청년단원, 노일환은 일제 때부터 『동아일보』 기자 등으로 활약한 호남 지주 출신의 한민당원, 박윤원은 광복청년단 지방간부, 강욱중은 민족청년단원, 김병회는 독립촉성국민회원, 김약수는 한민당 간부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혹독한 구문이 가해졌지만, 증거는 없었다. 증거랍시고 제시된 건 한 여간첩의 음부에서 빼낸 문건이라는 건데 그 문건의 내용은 신문 기사 수준의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여간첩은 법정에 나타나지도 않아 그 존재조차 의문시되었으며, 이에 대해 검찰총장 권승렬은 국회에서 횡설수설했다. 모든 게 그야말로 '코미디 수준' 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0. 20:24

'농민의 보수화 시작'


10월항쟁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당시까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민위원회의 파국을 낳았다. 그러나 궁극적인 피해자는 농민이었다. 커밍스는 "봉기의 결과가 가져온 한국 빈농들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의 이익을 지켜 주었던 지방 조직들의 붕괴였다"며, "대부분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들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남한 전역에 울려 퍼졌다"라고 했다.


"좌파의 주요 기구의 전국 및 지방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든지, 투옥되었든지, 쫓기고 있든지 혹은 지하로 잠입하였다. 그들의 수많은 지지자들은 정치에서 떠나거나 더욱 급진적으로 되었다. 좌파 전체를 포용했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분쇄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적 지지를 상실한 채 보다 극단적이며 포용력이 적은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빈농들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는다는 단순한 합리성에 입각하여 묵묵히 경작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농민의 보수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이 농촌을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상처에 근거한 것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0. 19:10

'내쟁(內爭)에만 용감한 백성'


진압 후에도 대구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끊이지 않았다. 김두한의 대한민청을 비롯한 우익 청년당원들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귀속가옥에 급조한 유치장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 가두면서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경찰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2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된 10월항쟁에는 약 300만 명이 참여했는데, 경찰 200명 이상이 피살되었고, 죽은 관리, 시위자 및 민간인 수는 1천 명이 넘었다. 체포된 사람은 3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하지(존 하지, John Reed Hodge, 주한 미군 사령관 겸 미군정 사령관)는 대구항쟁시 남한을 '끓고 있는 화산', '화약 상자'로 비유했지만, 주된 원인 제공자는 미군정이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구항쟁의 배경에 대해 김삼웅은 "전평 등 좌익의 조종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해방 이후 새로운 민주사회의 건설에서 제반 개혁의 요구가 좌절된 데 대한 민중의 항거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처벌되기는커녕 당당하게 재동장하는 친일파, 토지개혁의 지연, 미소공위 결렬로 통일정부 수립 기대에 대한 좌절, 미군정의 공장 접수, 만연하는 실업난과 물가고, 귀환동포에 대한 무대책 등이 민중들에게 극심한 좌절감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이런 상황에서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일제의 공출이나 다름없는 미군적의 하곡·추곡에 대한 강제매입과 극심한 식량난이었다."


언론인 오기영은 월간 『신천지』 47년 11월호에 쓴 글에서 이 사건에 대해 "나는 일찍 만보산사건을 빌미로 일어났던 중국인 배척 사건을 평양에서 목격하고 제 살을 깎고 뼈를 저리게 하는 압박자에게는 지친 듯이 유순하던 조선 사람이 이역에 와서 날품팔이하는 고독한 중국인에게는 어이 이리 잔인한가를 통탄하였습니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그때는 그래도 만주에 있는 동포가 학대되었다는 적개심에서 폭발된 참극입니다마는 40년이나 우리의 피를 빨던 왜구는 뺨 한 개 친일 없이 주지 말라는 돈까지 몰래 주어서 고이고이 돌려보내더니 이제 골육간에 이런 피를 흘리다니 이래도 이 땅에 풍년을 주는 하늘의 은혜가 그지없이 두렵습니다. 외적에게 무력하고 내쟁(內爭)에는 용감한 백성이라고 나의 어느 선배는 말한 일이 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하여 나는 이것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9. 22:17

'대구에 분 피바람'


10월 1일 정오 대구시청 앞에서는 약 1천 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모여 쌀을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오후 2시 30분에는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에 들어간 노동자 500여 명이 경찰과 충돌하였는데, 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1명이 사망했다.


이 사망으로 인해 다음날인 10월 2일 시위대의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날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사람의 주검을 메고 시위에 참여할 만큼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는 대구경찰서를 점령해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꾸리고 시내 대부분의 파출소까지 점령해 버렸다. 


한 국제통신사는 "24시간에 걸친 피의 폭동이 일어나 38명의 경찰관이 죽고 확인할 수 없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사살당했다. 이 도시는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보도했다.


대구항쟁은 직접적으로는 식량 문제와 더불어 친일 경찰에 대한 불만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친일파 중에서도 친일 경찰이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 거의 다 자취를 감추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의 부름을 받아 전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면서 횡포를 일삼는 것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미군정은 10월 2일 오후 6시쯤에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채 전차를 앞세워 시위를 진압했다. 진압 후 대구에 도착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폭동에 가담했던 폭도들은 모조로 체포, 구송하고 주모자는 즉결처분해 버리라"고 지시했고, 이후 피바람이 불었다. 경무부 고문인 대령 매글린이 "민주경찰이 국민의 생명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장택상에게 항의할 정도였다.


대구봉기는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곧 진압되었으나 그 여파는 경남북지방의 농촌을 거쳐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대되면서 전국적인 농민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1월 상순까지 전국 90개 군 이상에서 항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예컨대, 선산 지역의 항쟁은 박상희(박정희의 형)가 10월 3일 오전 9시경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미경찰서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구미면사무소와 선산군청도 공격해 식량 130여 가마니를 탈취하였다. 박상희는 분노한 군중으로부터 경찰관을 보호함으로써 많은 인명피해가 난 경북의 다른 지역과 달리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선산 지역의 항쟁은 6일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박상희는 그 과정에서 사살당하였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9. 20:12

'해방의 선물은 기근'


1946년 10월 1일에 발생한 대구항쟁은 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몇 개월 전 대구 [영남일보]는 "쌀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썼다가 이틀간 정간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1946년 대구의 식량사정은 어떠했던가?


1945년 11월에 쌀 한 말 가격은 140원이었지만, 1946년 9월 말에는 1,500원으로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10배 이상이나 올랐다. 시민들은 쌀을 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굶주려야만 했다. 문자 그대로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초근목피(草根木皮)의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민학교 학생 중 80% 이상이 결식아동이었으며, 그로인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결석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전매청의 연초공장 노동자들은 심지어 담뱃잎을 마는 종이에 붙이는 풀까지 먹었다.


당시 전평 대구화학노조 서기 이일재의 증언이다.

"기아상태가 어느 정도 심각했느냐 하면 전매청의 연초공장에서 담배를 말아 붙이는 데 쓰는 풀이 나오면 직공들이 그 풀을 다 먹어치워 버릴 정도였어요. 풀을 먹지 못하게 검고 붉은 물감을 섞어서 내놓았지만 그것조차 몰래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지경이었어요. 그런데도 미군과 경찰은 굶주림으로 힘 없이 누워 있는 사람들을 콜레라에 감염되었다고 환자들만 격리 수용되는 곳으로 싣고 갔는데, 그러면 영락없이 죽고 마는 거지요."


1946년 4월 [영남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 그대로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세상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5월에는 콜레라마저 발생하여 대구시만 1,200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진 데다 그로 인해 외부에서의 쌀 반입도 끊기게 되었고, 6월에는 수해가 발생하여 쌀 대체작물이 큰 피해를 입은 데다 교통마저 두절되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나 몰라라 했다. 굶어죽게 된 시민들이 군정에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자, 미군정 관리는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조선에는 빵, 고기, 과일 등이 많은데 왜 쌀만 요구하느냐"고 질책하였다.


대구의 정치적 사정도 다른 지역과는 달랐다. 대구의 좌익세력은 일제하에서 어느 세력보다 더 치열하게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 왔기 때문에 시민들의 강한 신뢰를 얻어 해방 후에도 각 부문별 대중조직을 결성하여 폭넓은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 우익세력엔 친일파가 많아 대중적 기반이 매우 취약하였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