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8. 10. 23:43
6. 미군이 제안한 '초토화 작전'
앞서 지적했듯이, 4.3항쟁에 대한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명하면서 민중을 '사냥' 해야 할 인간 이하의 '동물적 대상' 으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인간 사냥' 으로 인해 빚어진 가장 참혹한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발생하였다. 이 기간 중 160여개 마을 가운데 130여개 마을의 수만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8월 24일 한미(韓美) 사이에 맺어진 '한미 군사안전 잠정협정' 에 따라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작전권을 갖게 되었다. 이런 큰 변화가 있었으니 그 이전에 벌어진 학살극도 이젠 달라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달라지긴 했다. 학살은 더욱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다. 6일 만인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 핵심은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 기간 중 전 도의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게 바로 그 악명 높은 '초토화 작전' 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미군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4.3 발발 직후 제9연대장으로서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군정장관 윌리엄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 제주도 폭동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면서, 이를 거절하는 자신에게 작전 수행 후 미국행 알선과 10만달러의 돈을 주겠다며 유혹했다고 밝혔다.
김익렬의 밑에서 9연대 정보참모로 일했던 이윤락도 "CIC(방첩대) 소령이 김익렬 연대장과 나에게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를 적성(敵性) 지역으로 간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다.
바로 이 초토화 작전이 5개월 만에 실행된 것이었다. 이 작전에 따라 10월 18일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다. 10월 19일에 제주에 파병될 예정이던 여수 주둔 14연대 1개 대대는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제5여단장으로서 제주도 경비사령부 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던 대령 김상겸이 5여단 예하부대인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파면되었다. 그래서 송요찬이 제주도 경비사령관까지 맡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계엄령은 12월 31일에 해제되지만, 선포부터가 불법이었다. 이 당시 군내엔 계엄법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제주는 법의 지배를 받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중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총살하는 초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아니 '인간 사냥' 이었다. 무슨 항거를 해야 '진압' 이 아닌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95~197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앞서 지적했듯이, 4.3항쟁에 대한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명하면서 민중을 '사냥' 해야 할 인간 이하의 '동물적 대상' 으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인간 사냥' 으로 인해 빚어진 가장 참혹한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발생하였다. 이 기간 중 160여개 마을 가운데 130여개 마을의 수만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8월 24일 한미(韓美) 사이에 맺어진 '한미 군사안전 잠정협정' 에 따라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작전권을 갖게 되었다. 이런 큰 변화가 있었으니 그 이전에 벌어진 학살극도 이젠 달라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달라지긴 했다. 학살은 더욱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다. 6일 만인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 핵심은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 기간 중 전 도의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토벌대는 이 또래의 아이들까지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게 바로 그 악명 높은 '초토화 작전' 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미군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4.3 발발 직후 제9연대장으로서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군정장관 윌리엄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 제주도 폭동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면서, 이를 거절하는 자신에게 작전 수행 후 미국행 알선과 10만달러의 돈을 주겠다며 유혹했다고 밝혔다.
김익렬의 밑에서 9연대 정보참모로 일했던 이윤락도 "CIC(방첩대) 소령이 김익렬 연대장과 나에게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를 적성(敵性) 지역으로 간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다.
바로 이 초토화 작전이 5개월 만에 실행된 것이었다. 이 작전에 따라 10월 18일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다. 10월 19일에 제주에 파병될 예정이던 여수 주둔 14연대 1개 대대는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제5여단장으로서 제주도 경비사령부 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던 대령 김상겸이 5여단 예하부대인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파면되었다. 그래서 송요찬이 제주도 경비사령관까지 맡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계엄령은 12월 31일에 해제되지만, 선포부터가 불법이었다. 이 당시 군내엔 계엄법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제주는 법의 지배를 받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중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총살하는 초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아니 '인간 사냥' 이었다. 무슨 항거를 해야 '진압' 이 아닌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95~197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