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7. 23. 23:04
1. 제주 인구의 10%가 죽은 대참사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훗날 긴 세월 끝에 '제주 4.3항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 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리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제주 4.3항쟁은 30여만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3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희생자 수를 정확히 알기가 어려워 심지어 '8만명 희생설'까지 나왔다. 3만명이라고 해도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었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었다. 이들이 모두 골수 빨갱이라 하더라도, 어이하여 3만명이 희생될 수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아가 5.6%, 61세 이상 노인이 6.2%나 차지하고 있다는 건 어찌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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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항쟁으로 인해 희생된 제주시민의 유골들

이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이해하기 위해선 지난 1년간 일어난 일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47년 3.1사건 이후 48년 4.3발발 직전까지 1년동안 2천500명이 검속되었다.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가로 3미터 세로 3.6미터의 감방 하나에 35명이 갇혀 있어야 했다.

3.1사건 이후 지역주민과 경찰이 자주 충돌하였는데, 47년 3월 우도와 중문리 사건, 6월 종달리 사건, 8월 북촌리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47년 9월부터 우익 청년단체의 조직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회(서청) 제주 조직이 발족되었으며,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 단부도 창립되었다.

48년 3월 경찰에 연행됐던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민심이 동요되었다. 죽은 청년들과 같이 수감되었던 청년들의 증언에 따르면,

"지서에서는 매질부터 시작했다. 주로 몽둥이로 때리거나 각목을 다리 사이에 끼워 위에서 밟기도 하고 물고문을 하기도 했다. 수감자들이 더욱 울분을 느꼈던 것은 경찰관들이 심심하면 한 사람씩 불러내 장난삼아 고문을 했던 일이다..... 경찰관들이 형님의 머리카락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송곳으로 불알을 찌르는 고문을 하다가 결국 불알이 상해 숨지게 됐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06~108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