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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1.21 거창 양민 학살 사건 - 2
  2. 2017.01.19 거창 양민 학살 사건 - 1
posted by Belle〃♬ 2017. 1. 21. 13:59

조병옥과 이시언의 고언(苦言)


이 사건은 『뉴욕타임스』 등 외국 언론의 보도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데다 이미 일어난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국회의 중간 보고가 1951년 4월 25일로 예정돼 있던 터라, 이승만은 4월 24일 국무회의를 소집하고선 자기 나름대론 비상한 대책을 발표하였다.


"정부 장관들은 서로 협력해서 일을 해야 하는 법이오. 거창 사건을 두고 내무·법무·국방 3부 장관들이 서로 협력하지 아니한 까닭에 대한민국의 체면이 손상당했소. 그러므로 3부 장관은 사임해야겠소."


평소 이승만을 '선생님'이라고 불러 온 조병옥은 "선생님, 저는 즉시 사임하겠습니다만, 국무위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사임하려는데 발언해도 좋겠습니까"라고 허락을 얻은 뒤 이렇게 말했다.


"정부 12부 중 11부 장관은 서로 협력해서 일을 잘하고 있습니다. 다만 신성모 국방부장관만이 협력을 않는 실정입니다. 이번 거창 사건도 순전히 있는 사실을 없다고 복명서를 꾸며 대통령께 보고하여 조사 시일을 끌었던 까닭에 국가의 위신이 손상되었으며 거창 사건을 발생케 한 장본인이 군인인 까닭에 그 책임은 오로지 신 국방부장관에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조병옥은 이 말을 하고 국무회의장을 나가 사표를 쓰고 떠났다. 장문의 사표였다.


"본인이 대통령의 명에 의거해 사표를 제출하는 바 각하를 보좌하던 국무위원 1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충언을 올리고 내무부장관의 자리를 물러납니다. 첫째, 행정은 제도상으로 운영되어야 할 것이며 개인의 의욕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둘째, 정치는 재인(在人)이니 양심적이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십시오. 셋째,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로 탄생했으므로 반드시 민주국가로 성장 발전하여야 됩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일보라도 민주주의로부터 후퇴할 때에는 자유세계로부터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김준연도 즉시 사직서를 냈지만, 신성모는 미적거리며 자신의 구명 연판장을 돌리게 하였다. 3군총사령관을 비롯하여 각 일선 사단장급들이 신성모의 국방부장관 유임을 진정하였고, 신성모는 계속 군지휘관회의를 주재하엿다.


신성모는 김종원에게 국회 조사단의 현지 접근을 막으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김종원은 예하 장병을 공비로 가장시켜 국회 조사단에게 위협사격을 가해 내쫓는 짓까지 저질렀다. 이것이 정치 문제가 되고 5월 들어 진상이 밝혀졌지만, 이승만은 이들을 계속 비호하였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부에 몸담고 있는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길 일이었다. 5월 9일 부통령 이시영은 이승만의 파탄을 비판하는 동시에 자신의 무능과 자괴감 등을 담은 '국민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회에 사의를 표했다.


"탐관오리는 도처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앙을 실추케 하고 정부의 위신을 손상케 하며 신생 대한민국의 장래에 암영을 던져주고, 누가 참다운 애국자인지 흑백과 옥석을 가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과거 3년동안 아무런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돌아가 국민과 더불어 고락과 생사를 같이하려 한다. ······ 선량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국정감사를 더욱 철저히 하여 이도(吏道, 벼슬아치의 도리)에 어긋난 관료들을 적발·규탄하되, 모든 부정 사건에 적극적 조치를 취해 국민의 의혹을 석연히 풀어주기 바란다."


국회에선 재석 131명 중 115명이 사임에 반대해 사임서를 반려했지만 이시영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국회의 각파 대표들은 이승만을 방문해 이시영의 사임을 만류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승만은 "부통령이 현 정부를 만족하게 생각지 않아서 나가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며 거절했다.


5월 15일 국회는 제2대 부통령으로 김성수를 선출하였다. 김성수는 78표(51%)를 얻어 당선되었다.(사임을 원한 이시영에게도 73표가 나왔다)




이승만의 특정인 총애


이승만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여론이 악화되자 1951년 5월 5일에서야 신성모를 국방부장관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기붕을 장관에 임명하였지만, 아직 신성모에 대한 애정까지 접은 건 아니었다. 이승만은 6월 26일 국무회의에서 "신성모를 주일 한국대표로 임명하는데 찬성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주시오"라고 말했다. 이미 6월 23일에 신성모의 임명에 관해 일본에까지 통보해놓고 벌인 연극이었다. 김성수는 단호하게 반대하였으며, 어느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이승만을 결정을 재고하도록 요구하면서 오전 회의를 종료했다. 오후 회의에 김성수는 불참했고, 신성모의 주일 한국대표 임명 건은 4대 6으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결과를 무시하고 신성모를 임명했다. 김성수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아 앓아 눕게 된다.


거창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단의 보고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학살을 저지른 제3대대가 합동작전 때 받은 작전명령 부록에는 "작전 지역 내 인원들을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 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는 소각하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문제되자 11사단 본부는 원래의 작전명령을 회수하고 "작전 지역 내 주민들 가운데 이적 행위를 한 자들은 간이 군법회의에 의해서 처단하라"는 내용으로 변조된 작전명령을 내렸다.


8월 6일 군법회의 제5회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두한 김종원은 "작전명령이 변조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며, 이는 국방부장관과 참모총장으로부터 이 사건이 확대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지시를 받고 자신이 주동이되어 꾸민 것이었다"고 밝혔다. 또 그는 합동조사단의 피습 사건도 "공비의 소행이 아니라 자신이 제9연대의 병력을 조사단의 길목에 배치시켜 따발총으로 위협사격하게 하여 조사를 호위하던 무장 경관이 부상을 당한 것처럼 꾸몄다"고 진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모는 이승만의 총애에 의해 면책되었다. 군법회의는 연대장 오익경에게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년,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이들은 사면을 받고 복권되었다.


거창 사건을 일으킨 제3대대에 한 통역 장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리영희였다. 그는 사건 발생 훨씬 후에야 이 사건을 알게 되었고, 축소된 학살 규모의 진상은 수십 년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그는 훗날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쟁터에서 지휘관과 (미국) 고문관을 따라다니기만 하는 것으로 소임을 삼았거나, 안전한 후방만을 골라서 근무하는데 재주를 부렸다면 거창 사건 희생자 719명과 그 유족들에게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죄책감으로 느낄 필요가 없다. '나는 모르는 일, 내 소임 밖의 일'이라는 한마디로 이 사건을 오래전에 잊어버렸을 것이다. 어째서 이 나라는 인간 말살의 범죄가 '공비'나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이처럼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 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이데올로기의 광신 사상과 휴머니즘에 대한 멸시를 깨쳐야겠다는 강렬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낀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의 '잔인성'을 나무라는 데 동조하지 않게 되었다. 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장 한동석 소령, 그리고 제11사단장 최덕신 소장은, 거창 사건 후, 우리 사단이 지리산 작전을 제8사단에 인계하고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도중 군법회의가 회부되어 부대를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1년도 복역하지 않고 석방되었다. 광신적 반공주의, 전쟁과 군대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때부터 더욱 달라져 갔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9. 21:04

719명의 민간인 학살


전남 함평에서 민간인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천 454동을 불태웠던 11사단 예하 부대의 이른바 '견벽청야' 학살극은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또다시 발생했다. 11사단 9연대 제3대대는 719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죽은 사람 가운데 14세 이하가 전체 사망자의 전반인 359명이었으며, 60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사망자의 10%, 그리고 나머지 40%의 사망자 중에서도 3분의 2는 부녀자들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을까? 이런 일련의 학살극은 국가의 존재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톱질전쟁'이라고 하는 전쟁의 구조상 전선이 따로 없는 가운데 빨치산 출몰 지역은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 지배하에 놓이기 마련이었다. 그런 지역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낮에는 국군에 협조하고 밤에는 빨치산에 협조하는 '이중 생활'을 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 토벌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빨치산에 협조하는 자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11사단 9연대(연대장 오익경)는 51년 2월초, 거창을 포함해 함양·산청 등 지리산 남부 지역에서 공비 소탕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이에 따라 거창의 제3대대를 중심으로 경찰과 청년의용대 등이 2월 7일 신원면에 진주하게 되었다.


빨치산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산으로 퇴각하자, 제3대대는 경찰과 청년의용대 병력을 남기고 작전 계획에 따라 신창 방면으로 이동했다. 군대가 신원면을 떠나자 빨치산은 그 날 밤 습격을 해 경찰과 교전하게 되었고, 경찰과 청년의용대 병력만으로는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 제3대대는 다시 신원면으로 진주하였다.


제3대대장 소령 한동석은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 1천여 명을 신원국민학교로 소집했다. 성인 남자들은 이미 피신을 한 뒤였기 때문에 모인 주민 대부분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한동석은 지서 주임, 사찰계 형사, 신원 면장 등으로 하여금 군인, 경찰, 공무원 및 지방유지 가족을 골라내게 한 뒤 남은 사람들을 박산 골짜기로 끌고 가서 기관총으로 집단학살한 후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시체더미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기도 했다 2월 10일에서 13일 사이에 저질러진 일이었다.


살해 대상자 선별 기준은 오직 한가지였다. 군인, 경찰, 공무원 및 지방유지 가족이냐 아니냐 하는 것. 그 선별의 악역을 맡은 사람 중의 하나인 <박영보 면장>을 제목으로 고은은 이런 시를 지었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이름/청야작전!/신원초등학교 교실마다 잡혀온 6백명/한 장교가/이중에 군경가족 있느냐고 물었다/몇 가족이 나왔다/사실이었다/또 몇 사람이 나왔다/사실이 아니었다/살기 위해/군경가족이라고 말했다/그때 면장 박영보가 나섰다/유들유들한 얼굴/큰 점 하나 늘어붙은 얼굴/그가/한 사람을 끌어냈다/네가 무슨 군경가족이가/또 한 사람을 끌어냈다/네가 무슨 군경가족이란 말이가/6백명 면민들 묶여갔다/비탈진 산자락/후미진 산골짝 거기 총소리 퍼부었다/그러다가/조용해졌다/······"




신성모의 사건 은폐 지시


제3대대는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시체를 휘발유로 불태우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을 뿐만 아니라 학살 지역을 외부와의 왕래로부터 일체 차단했다. 생존 주민들에게는 학살에 대해 발설할 경우 공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학살시 밖에 나갔다가 뒤늦게 돌아온 가족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고은의 <거창 이복남>이다.


"1951년 1월 이철수는 열네살이었습니다/할머니 유분녀/아버지 이종묵/어머니 백씨/동생 철호/머슴 박서방/식모 쌍가마 참례/이렇게 여섯이 빨갱이라는 죄로 학살당했습니다/그런데/외갓집 갔던 철수와 누이동생 복남이는 살아 남았습니다/국군은/열살짜리 복남이를 끌고 가서/손바닥에 못 박아/빨갱이라고 말하라고 협박했습니다/빨갱이 아니어요/빨갱이 아니어요/하고/마구 울부짖었습니다/그러다가/빨갱이입니다/하고 말해 버렸습니다/기절했습니다/세상은 얼어붙었습니다/하늘/푸르게/푸르게 얼어붙었습니다/오빠 철수는/세상이 무서워/국군이 무서워/산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어이할 수 없이/빨치산 소년이 되었습니다"


제3대대는 719명을 죽인 전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은폐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대대장 한동석은 학살자의 숫자를 187명으로 줄여 공비 및 통비분자들을 소탕했다고 연대에 보고했다. 그러나 한두 명도 아니고 허공으로 사라진 532명을 어떻게 은폐할 수 있었겠는가.


이 사건은 2월 말경 피난 수도인 부산까지 소문으로 퍼졌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사건 한 달 후인 3월 12일 제11사단 자체가 육군과 국방부에 진상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보고서는 "학살 주민의 대부분이 양민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이 밖에도 부녀자 강간·물품 강요·재산 약탈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미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국방부장관 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 같은 군의 비행이 외국에 알려진다면 전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군의 사기를 해친다"고 하며 사건을 은폐할 것을 지시했다. 또 그는 헌병사령관 겸 경상남도 지구 계엄사 부장이었던 김종원 대령 등을 대동하고 3월 중순경 사건 현장을 답사한 후 "보고된 희생자들 187명은 모두 통비분자 들이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 법무부, 내무부의 조사 결과는 제각각이었다. 학살자 수에 대해 국방부는 225명, 법무부는 275명, 내무부는 350명이라고 보고했다. 범무부장관은 김준연, 내무부장관은 조병옥이었다. 민국당 출신 조병옥과 김중연은 전쟁 발발과 동시에 거국내각의 명분으로 입각했었다.


당시 민국당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고 있었던 바, 이승만은 조병옥과 김준연이 진상 조사에 적극적이며 이 사건을 계속 거론하는 이유가 신성모는 물론 자신까지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