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8. 4. 22:32
7. 숙군(肅軍) 작업과 박정희 체포

여순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숙군(肅軍)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군법무관 김완용을 불러 "한 달 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아 죽이고 오라"면서 숙군 작업을 몰아붙였다. 남로당 세력뿐만 아니라 광복군 계열까지 제거대상으로 삼은 숙군 작업은 48년 10월부터 49년 7월까지 진행돼 전 군(軍)의 약 5%에 달하는 4천749명을 숙청하였다. 이 중 2천 명 이상이 총살형을 당했다. 초급장교와 하사관의 경우엔 전체의 3분의 1이 체포, 구금, 처형, 또는 제대당했다. 군 내부의 반공이념교육도 더욱 강화돼, 48년 11월 29일 국방부 내에 반공이념교육을 목적으로 한 정치국(후에 정훈국으로 개칭)이 설치되었다.

숙군은 증거주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많은 무리가 있었다.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내는 식이었고, 다른 좌익을 대라고 또 고문을 가하는 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총살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거나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며 죽어간 이들도 있었다. 이런 식의 고문수사를 통한 숙군 작업에 탁월한 면을 보여 나중에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특무부대장이 된 인물이 바로 김창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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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 작업의 와중에서 48년 11월 11일 소령 박정희도 체포되었다. 42년 만주군관학교 졸업, 44년 4월 일본 육사 졸업 후에 44년 7월 일본 만주군 소위로 부임한 박정희는 해방 후 베이징으로 가서 광복군이 되었다가 46년 12월 경비사관학교 2기를 졸업했는데, 여순사건이 터지자 우습게도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되었다. 우습다는 건 그가 남로당 프락치였기 때문이다.

만주군에서 광복군으로 변신했던 박정희는 좌익에서 우익으로 또 한번 변신을 꿈꾸고 군부 안의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 수사에 적극 협력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은 것이다. 군내 남로당의 조직표까지 그려서 제출했다. 박정희는 일단 기소돼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남로당원 색출의 공로를 인정받은 데다 그의 만주군 선배들이 적극 구명운동에 나서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반공(反共) 국가'를 완성시키기 위한 계기로 간주하여 이후 전사회의 병영화를 위한 방안들을 계속 내놓게 된다. 한국 사회가 반공을 국교(國敎)로 삼다시피 하는 외길로만 내달리는 동안 여순사건은 악명(惡名)과 오명(汚名)을 뒤집어쓴 채 피해자들은 숨을 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여순사건이 거의 진압되어 가던 9월 29일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은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아주 모호해서 정권이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11월 14일자 사설 <국가보안법을 배격함>은 국가보안법이 "크게 우려할 악법이 될 것"이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6~190쪽
posted by Belle〃♬ 2007. 8. 4. 00:04
6. 사망자 2천 600명

여순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끔찍했다.

여수 지역 국회의원 황명규는 정부의 진압과정에서 여수에서는 3천 400여 가옥이 불에 탔고, 약 2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여수에 진압군이 들어온 26일, 그리고 27일 불이 났을 때 소방서장이 불을 끄려고 사람들을 모으자 5연대장 김종원이 총대로 서장을 구타하여 쫓아냈다는 증언은 이 불이 진압군의 의도적인 방화였을 가능성을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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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와중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참혹한 모습 I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여순사건으로 인해 토벌군은 141명이 사망, 263명이 실종, 391명이 반란군 측에 합류했으며, 반란군은 821명이 사망했고 2천 860명이 체포되었다. 48년 11월 말 미군 소식통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약 1만 7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반란군에 참가했다는 혐의를 받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그들 중 866명이 사형언도를 받았다.

전라남도 보건후생국은 11월 1일 여수에서는 약 1천 300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약 900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37억 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으며, 순천에서는 1천 135명이 사망하고 103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천350만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고 보고했다.

보성(80명), 광양(57명), 구례(30명), 고흥(26명), 곡성(6명) 등에서도 약 2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여순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2천600명이 넘었고, 중경상자는 약 1천500명, 행방불명이 825명이었다.

『한국전쟁사』를 필두로 한 공식 기록물들은 그 수많은 사망자들을 "인민재판 등 폭도들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인민재판이란 구경꾼 앞에서 하는 재판인데 그걸 봤다는 증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무얼 말하는가. 10월 26일 진압작전 이전까지 반란군 치하에서 희생된 사람은 경찰관 74명과 우익인사 등 민간인 16명뿐이라는 설과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모두 155명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 만약 반란군이나 폭도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그 유족은 군경 유가족에 준한 대접을 받을 수 있고 부역자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왜 지금까지 침묵만 지키고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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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와중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참혹한 모습 II



미국은 여순사건에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고문단장 준장 로버츠는 진압군 측에 무기, 탄약, 휘발유, 식량 등을 무제한 공급하였다. 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 책임자였던 대위 짐 하우스만은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미 국방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미국 측은 여순사건의 진압이 '성공적' 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군의 작전 능력과 순발력을 과시한 계기"가 되었고 "(경찰 보조 병력으로 산돼지 몰이나 하던) 한국군 현대화의 시발"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건 발생 사흘째인 10월 21일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은 기자회견에서 사실상 김구를 겨냥하여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서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으며, 그래서 시중에는 여순반란에 김구의 선동이 작용하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주한미군 정보참모부는 김구가 반란을 선동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기록하면서 그 근거로 ① 경비대 내에 김구의 추종자들이 상당하며, 반란의 공격 목표가 현 정부라는 점, ② 사건 직전 김구가 전남 광주를 방문했다는 점, ③ 이범석이 여순반란에 우익들이 개입했다고 발표한 점 등을 들었다. 김구는 10월 27일 기자회견에서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3~186쪽
posted by Belle〃♬ 2007. 8. 2. 23:08

5. 이승만 정권의 여론 조작

토벌군과 정부는 허위사실까지 유포하여 '여순 지역 죽이기'에 나섰다. 어린 여학생들이 총을 들고 싸웠으먀 국군에게 '오빠!' 하고 달려가서 치마 속에서 총을 꺼내 국군을 죽였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전혀 사실무근이었지만 널리 유포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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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이 주민들을 초등학교로 이송중인 모습

소령 함병선은 어린 여학생이 전봇대 뒤에 숨어 자신을 총으로 쏘았는데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비켜갔다는 증언까지 남겼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여학생을 훈계해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당시 여수에서 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극의 잔인성에 비추어 볼 때에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바로 이런 식의 이야기와 소문이 정부의 강경 대응책을 내놓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8년 11월 4일 여순사건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앞잡이'가 되었고, 여학생들도 심하게 반란군에 가담하였다고 발표해 여론을 호도하였다.

엄격하게 동제된 신문들에 의한 여론조작은, 학살은 은폐하고 '미담(美談)' 수준의 이야기만 양산했다. 임종명이 이 시기 신문기사들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처음에는 "양민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작전" 대신 "소극적인 작전"도 마다 않았던 "관군"이 시내에 돌입해서는 "먼저 식량창고를 탈취하여 시민의 식량을 확보"하고 "서(西)국민학교나 여수국민학교에 수용"된 "피난민에게는 주먹밥을 나누어 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국군"의 모습을 재현했으며, "국군"은 "인명을 보호"하는 수호천사로 묘사되었다.

또 문교부는 문인들을 현지에 파견해 시찰을 시킨 다음 정부에 유리한 글을 쓰게 했다. 박종화, 이헌구, 정비석, 최영수, 김송 등은 서울역에서 문교부장관의 전송을 받으면서 기차를 탔다. 『동아일보』 48년 11월 24일자에는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한 작전장교의 언급을 박종화가 윤색하여 정리한 글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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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에 희생된 경찰관&의용단원

"우리 민족은 이렇게 나가야 하고 이렇게 싸워야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고 이렇게 죽어야 하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조직적으로 체계 있게 머리 속에 깊이 넣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공연한 미국식 민주주의, 미국식 자유주의가 이런한 혼란을 일으켜 놓은 것입니다. 이 악랄한 세계 제패의 공산주의자의 사상은 학교뿐 아니라 군인과 사회 속 각층 각 방면에 침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불행한 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입니다. 정부에서는 우리 민족이 가져야 할 국시를 하루바삐 명확하게 세워서 3천만 전민족의 머리 속에 깊이깊이 뿌리박고 일어나도록 교육하고 선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전역에 게엄령을 확대했으며, 게엄령은 다음해 49년 2월 5일까지 지속되었다. 정부는 반란을 일으킨 14연대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전국적으로 각 건물에서 4호실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고, 토벌작전에 지장이 있다고 3개월 동안 여수-서울 간 열차를 없애 버리고 전주-서울 간만을 오가게 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1~183쪽

posted by Belle〃♬ 2007. 7. 31. 22:57
4. '손가락총'과 김종원의 참수형

반란군에 가담했던 사람의 선별 작업은 마구잡이식이었다. 예컨대, 당시 가담자들이 신발공장에서 '찌까다비'(일할 때 신는 신발)를 가져다 신었다는 소문 하나만 듣고 진압군은 그 신발을 신은 청년은 무조건 사살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청년들이 학생복을 입은 죄로, 머리를 군대식으로 짧게 깎은 죄로, 국방색 런닝셔츠를 입은 죄로 살해되었다.

'손가락총'도 동원되었다. 당시 여수군청 직원이었던 김계유는 "세 곳에 모인 시민들에 대하여도 살아남은 경찰관이나 우익진영 요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소위 '심사' 라는 것을 했는데, 시민들 중에 가담자가 눈에 띄면 뒤따른 군경에게 '저 사람' 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즉결처분장으로 끌려가는 판이니 누구나 산목숨이라고 할 수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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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들에 의하여 여수서초등학교 교정으로 붇찹혀 온 여수시민 청장년들이 자기 집들이 불타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으로 잡혀있는 광경. 반란 동조 혐의자로 판명되면, 이곳 학교 뒤 교정에서 즉결처형(참수&총살) 되었다. 오른쪽 대열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부역 혐의자들로서, 이들 중 89명이 11월 1일 처형되었다.

그 손가락질은 곧 총살 대상을 지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손가락총'이었다. 홍영기는 "지역공동체 성원 간에 자행된 '손가락총'은 인간성 말살과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심사' 과정에서 '손가락총' 이라는 말이 유행하였으며 중상모략이 난무했었다. 이로 말미암아 무고한 희생자가 더욱 많아졌고, 그 희생의 주체가 누구인지 애매한 경우가 많았음은 물론이다"라고 말했다.

토벌군이 작전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조작과 반란군을 놓친 것에 대한 분풀이의 잔인성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5연대 지휘관인 대위 김종원의 행태였다. 5연대가 상륙작전을 하면서 마구 쏘아댄 박격포탄에 반란군이 아닌 12연대 수색대가 맞아 중대장과 하사관 1명이 전사했다. 그 어이없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김종원은 반란군을 찾아 돌산섬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수색했지만 허탕을 쳤다.

독이 오른 김종원은 아무 증거도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군내리에서 3명, 남면 안도에서 20여 명을 죽이고, 중앙국민학교에 자리잡은 부대로 돌아와 붙잡혀 온 청년들을 보고 "이놈들에게 칼 시험이나 해 보겠다"며 들고 다니던 일본도를 빼들고 한 청년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청년이 중상을 입고도 피를 흘리며 다른 청년들 뒤로 몸을 피하자 김종원은 계속 칼을 휘둘러 7명의 젊은이를 모두 죽였다. 희대의 즉결 참수(斬首)였던 것이다. 김종원은 6.25 때 '백두산 호랑이' 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바로 그런 인물이 유능한 군인이나 경찰로 대접받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0~181쪽
posted by Belle〃♬ 2007. 7. 30. 22:57
3.군경(軍警)의 잔인한 보복극

1948년 10월 20일 정보는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인 준장 로버츠, 국방장관 이범석,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다음날 광주에 여순반란사건을 진한하기 위한 작전지도부를 세우기로 결정했고, 이튿날 여수와 순천 지역에 게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3일 간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23일 미 군사고문관의 지휘를 받아 탱크와 함포사격 등의 지원을 받아 여수와 순천에 대한 집중공격을 실시했다. 23일 순천을 장악했고 25일에는 여수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탈환했다.

순천에서부터 군경(軍警)의 잔인한 보복극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순천의 모든 성인 남자들을 순천북초등학교 교정에 감금해 놓고 엉터리 선별 심사를 통해 가려낸 사람들을 각목과 쇠사슬, 그리고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악질적'이라고 판단된 10여 명을 교정에서 총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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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붙잡혀 온 여수여고 학생들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의 차석 검사인 박찬길이 총살당한 사건은 당시 무법(無法)의 광기(狂氣)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말해 준다. 경찰이 뒤집어씌운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는 조작된 것이었다. 박찬길의 즉석 총살은 그간 경찰이 검거한 좌익인사를 박찬길이 법 규정대로 처리해 빚어진 경찰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당시 경찰은 검찰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여수 진압작전은 10월 26일부터 시작되었다. 전 육군 병력의 3분의 1인 5개 연대와 7척의 해군 함정, 그리고 전 공군력에 해당하는 10대의 비행기까지 총동원되었다. 그런 여수에 대한 대대적인 봉쇄와 포격 이후 진압군이 막상 여수에 진입하고 보니 시내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반란군은 이미 24일 밤 소형 선박을 타고 탈출해 산 속으로 도주했던 것이다. 중위 김지회 등 반란군 1천여 명은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장기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남한 무장 유격전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일부 역사서엔 진압군이 26일과 27일 양일간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고 기록돼 있지만, 그건 사실과 전혀 달랐다. 이런 기록이 시사하는 건 당시 진압군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치열한 시가전'을 부각시켜야만 하는 압력을 받고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그 엄청난 병력과 장비를 동원한 대작전이 웃음거리로 전락한다면, 그건 군으로선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압군은 여수로 오는 도중에 반란군의 습격을 받아 혼비백산했었기 때문에 여수 진압작전을 전개할 때엔 "경악과 분노, 집단 히스테리 산태"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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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민간인들



그래서 애꿎은 민간인들이 있지도 않았던 '치열한 시가전'의 증거물로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진압군은 여수 서국민학교에 4만 명을 집결시켜 놓고 보복 대상자를 골라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여수여중 운동장 등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현장을 목격한 한 미국 기자는 『라이프』지 48년 12월 6일자에 쓴 기사에서 "이곳에서 폭동을 진압했던 정부의 군대가 반란자들의 잔학행위와 같은 짓의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오히려 그들보다 더한 보복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라고 썼다.

"한쪽에서는 그 광경을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징벌의 장면을 말하라고 한다면, 보고 있는 아녀자들의 숨막힐 것 같은 침묵과 자신들을 잡아온 사람들 앞에 너무나도 조신하게 엎드려 있는 모습과 그들의 얼굴 피부가 옥죄어 비틀어진 것 같은 그 표정, 그리고 총살되기 위해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한마디 항변도 없이 침묵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마디의 항변도 없었다. 살려 달라는 울부짖음도 없고 슬프고 애처로운 애원의 소리도 없었다. 신의 구원을 비는 어떤 중얼거림도 다음 생을 바라는 한마디의 호소조차 없었다. 수세기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울 수조차 있었겠는가."

10월 하순 해양대 학생으로 승선 실습을 하고 있던 리영희는 여순사건의 참혹한 현장을 보게 되었다. 그는 부산에서 여수로 출동한 함정에 타게 돼 진압 후 여수여자중학교에서 목격한 장면을 이렇게 증언했다.

"운동장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즐비해 있었고, 반란군과 진압군 쌍방의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젊은 민간인들이었다. 운동장 울타리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먼 발치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나는 동료 학생들을 재촉해서 그 자리를 빨리 떠나버렸다. 멸치를 뿌려놓은 것처럼, 운동장을 덮고 있는 구부러지고 찢어진 시체들을 목격한 후회와 공포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울타리 밖에서 울부짖고 있는 남녀노소의 시선이 두려워서였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76~180쪽
posted by Belle〃♬ 2007. 7. 28. 14:12
2. 경찰과 경비대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여순사건은 그 배경에 있어서 좌익 군인들이 '숙군(肅軍) 작업'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경찰과 경비대가 평소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다는 점도 자리하고 있었다(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국군에 편입됐고, 9월 5일에 각기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됐지만, 9월 5일 이전의 육군은 경비대였다). 14연대 군인들은 한 달 전인 9월 14일에도 구례에서 경찰과 충돌한 적이 있었다.

당시 여수군청 직원이었던 김계유는 "우리는 흔히 식민지 경찰 운운하면서 일제 경찰을 욕했지만 그래도 일제 경찰은 법에 걸려야 단속을 했고 무고한 양민을 건드리지는 않았다"며,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의 우리 민주경찰(?)은 일제 경찰을 빰칠 정도로 강퍅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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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29일 ‘국치일’에 분열식을 하는 조선경비대. 원래 국방경비법은 남조선국방경비대가 군대로 발전하는 것을 상정하면서, 군형법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준비된 것이다.

"국민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걸핏하면 생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때려잡는 바람에 '관제 공산당'이라는 새 용어가 생겨났고,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 무조건 쩔쩔 맸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흔히 좌익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쫓기게 되면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방경비대와 경찰은 마치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충돌하기 마련이었고, 그게 커지면 총격전까지 벌이는 일이 더러 있었다."

미군정의 차별대우도 갈등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미군정은 경찰에게는 창설 때부터 새 제복과 미제 카빈 소총을 지급한 반면 경비대에게는 일본 군복과 일제 소총을 지급했다. 장택상 등 경찰 간부들이 경비대를 경시하였고 경찰관들도 경비대를 경찰예비대로 간주하여 깔보곤 했던 것도 갈등을 키웠다."

경비대왜 경찰 사이에 빚어진 충돌은 전남에서만도 이미 여러 건 있었다. 47년 6월 3일 광주 4연대가 영암경찰서를 습격했던 시건이나 1948년 10월 광주 4연대 일부 병사들이 순천경찰서를 습격했던 일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14연대도 늘 그런 조짐을 보여 왔다.

"1948년 5월 4일 신월리에 14연대가 창설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들은 술집이나 다방 같은 데서 만나도 크고 작은 시비가 늘 붙었고 심지어는 길을 가다가도 만나기만 하면 태도가 불손하다느니, 왜 째려보느냐고 생트집을 잡아 싸우기 일쑤였다. 그때 시민들은 그들이 마주치기만 해도 무슨 일이 터지지 않을까 해서 늘 조마조마해야 했다."

14연대 내부에서는 휴가 중에 경찰서를 부소고 왔다는 이야기가 자랑거리로 통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부대 내 사병들은 군인과 경찰간에 싸움이 난 것이라고 짐작했을 정도였다. 반란 주종자들이 다른 군인들을 선동할 때에 "경찰을 타도하자"고 외친 것도 바로 그런 악감정에 호소하고자 한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74~176쪽
posted by Belle〃♬ 2007. 7. 27. 14:49

1.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1948년 10월 15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는 육군 사령부로부터 19일 오후 6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은 제14연대 내의 사병들을 갈등 속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중위 김지회와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전남도당 소속의 군인들은 월불(越北)이냐, 제주로 가는 길에 선상(船上) 반란이냐, 아니면 여수에서의 봉기냐 하는 세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였다. 결국 이들의 선택은 여수에서의 봉기였다. 이들은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는 주장을 비롯하여 남로당의 평소 선전 구호들을 외치면서 다른 군인들을 선동하여 제주 사태의 '진압군'으로 가는 대신 여수에서 '반란군'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반란군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반란을 일으킨 지 불과 네 시간 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파출소, 시청, 군청 등 치안기관과 행정기관을 장악했으며, 우익계 인사와 경찰관을 살상했다.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명,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 후원회장 등을 포함하여 우익계 인사와 그 가족 수십 명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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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신문기사

여수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반란군 2천 명은 순천으로 이동해 중위 홍순석이 지휘하는 제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힘을 합쳐 오후에는 순천까지 수중에 넣는 데 성공했다. 반란군은 다음날인 21일에는 인근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10월 20일 약 3만여 명의 여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민대회가 열렸고, 인민의용군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반란군은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이고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인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명령에 대해서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총궐기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인민위원회의 여수 행정기구 접수, 반동적 이승만 종속정권 처벌,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를 살포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73~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