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7. 28. 14:12
2. 경찰과 경비대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여순사건은 그 배경에 있어서 좌익 군인들이 '숙군(肅軍) 작업'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경찰과 경비대가 평소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다는 점도 자리하고 있었다(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국군에 편입됐고, 9월 5일에 각기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됐지만, 9월 5일 이전의 육군은 경비대였다). 14연대 군인들은 한 달 전인 9월 14일에도 구례에서 경찰과 충돌한 적이 있었다.

당시 여수군청 직원이었던 김계유는 "우리는 흔히 식민지 경찰 운운하면서 일제 경찰을 욕했지만 그래도 일제 경찰은 법에 걸려야 단속을 했고 무고한 양민을 건드리지는 않았다"며,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의 우리 민주경찰(?)은 일제 경찰을 빰칠 정도로 강퍅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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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29일 ‘국치일’에 분열식을 하는 조선경비대. 원래 국방경비법은 남조선국방경비대가 군대로 발전하는 것을 상정하면서, 군형법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준비된 것이다.

"국민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걸핏하면 생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때려잡는 바람에 '관제 공산당'이라는 새 용어가 생겨났고,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 무조건 쩔쩔 맸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흔히 좌익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쫓기게 되면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방경비대와 경찰은 마치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충돌하기 마련이었고, 그게 커지면 총격전까지 벌이는 일이 더러 있었다."

미군정의 차별대우도 갈등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미군정은 경찰에게는 창설 때부터 새 제복과 미제 카빈 소총을 지급한 반면 경비대에게는 일본 군복과 일제 소총을 지급했다. 장택상 등 경찰 간부들이 경비대를 경시하였고 경찰관들도 경비대를 경찰예비대로 간주하여 깔보곤 했던 것도 갈등을 키웠다."

경비대왜 경찰 사이에 빚어진 충돌은 전남에서만도 이미 여러 건 있었다. 47년 6월 3일 광주 4연대가 영암경찰서를 습격했던 시건이나 1948년 10월 광주 4연대 일부 병사들이 순천경찰서를 습격했던 일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14연대도 늘 그런 조짐을 보여 왔다.

"1948년 5월 4일 신월리에 14연대가 창설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들은 술집이나 다방 같은 데서 만나도 크고 작은 시비가 늘 붙었고 심지어는 길을 가다가도 만나기만 하면 태도가 불손하다느니, 왜 째려보느냐고 생트집을 잡아 싸우기 일쑤였다. 그때 시민들은 그들이 마주치기만 해도 무슨 일이 터지지 않을까 해서 늘 조마조마해야 했다."

14연대 내부에서는 휴가 중에 경찰서를 부소고 왔다는 이야기가 자랑거리로 통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부대 내 사병들은 군인과 경찰간에 싸움이 난 것이라고 짐작했을 정도였다. 반란 주종자들이 다른 군인들을 선동할 때에 "경찰을 타도하자"고 외친 것도 바로 그런 악감정에 호소하고자 한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74~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