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9. 27. 20:10
마지막. 노무현 대통령 발표문

제주4·3사건에 대한 대통령 발표문
존경하는 도민과 유족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

55년 전, 평화로운 이곳 제주도에서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중의 하나인 4·3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습니다.저는 이번 제주방문 전에 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에 의거해 각계 인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2년여의 조사를 통해 의결한 결과를 보고 받았습니다.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무고한 희생이 발생된 데 대한 정부의 사과와 희생자 명예회복, 그리고 추모사업의 적극적인 추진을 건의해왔습니다. 저는 이제야말로 해방 직후 정부 수립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제주도에서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 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됐습니다.저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목을 빕니다.정부는 4·3평화공원 조성, 신속한 명예회복 등 위원회의 건의사항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여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4·3사건의 소중한 교훈을 더욱 승화시킴으로써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확산시켜야 하겠습니다. 화해와 협력으로 이 땅에서 모든 대립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서 동북아와 세계화의 길을 열어나가야 하겠습니다.제주도민 여러분께서는 폐허를 딛고 맨 손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평화의 섬 제주를 재건해 냈습니다. 제주도민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이제 제주도는 인권의 상징이자 평화의 섬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전국민과 함께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3. 10. 31
대통령 노 무 현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제 추도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주도민과 4·3 유가족 여러분,
우리는 오늘, 58년 전 분단과 냉전이 불러온 불행한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습니다. 저는 먼저,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오랜 세월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디어 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무력충돌과 진압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 되었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제주도민과 유가족 여러분,
2년 반 전, 저는 4·3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여러분께 사과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내주신 박수와 눈물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정부는 그동안 희생자 명예회복과 추모사업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지난달에도 2,800여명을 4·3 희생자로 추가 인정했고, 이곳 4·3평화공원 조성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유해와 유적지를 발굴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지원해 나갈 것입니다.이제 4·3사건위원회가 건의한 정부의 사과와 명예회복, 추모사업 등은 나름대로 상당한 진전이 이뤄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국민적인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가능한 일 하나하나를 점진적으로 풀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앞으로도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4·3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무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랬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확보되고, 그 위에서 우리 국민들이 함께 상생하고 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아직도 과거사 정리 작업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의 걸림돌을 지금껏 넘어서지 못했던 것입니다.누구를 벌하고, 무엇을 빼앗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억울한 누명과 맺힌 한을 풀어주고,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다짐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통해 우리 국민이 하나가 되는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하나하나 매듭지어갈 때, 그 매듭은 미래를 향해 내딛는 새로운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보배입니다.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인이 사랑하는 평화의 섬, 번영의 섬으로 힘차게 도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주도가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도민 여러분은 폐허를 딛고 아름다운 섬을 재건해냈고, 어느 지역보다 높은 자치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민 스스로 결의해서 항상 중앙정부가 기대하는 이상의 높은 성과를 이루어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앞장서 나아가는 만큼 정부도 열심히 성원하고 힘껏 밀어드리겠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풍요롭고 활력 넘치는 제주를 만들어 나갑시다. 이 평화의 섬을 통해 한국과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합시다. 다시 한번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행사를 지켜보면서 그 엄청난 고통과 분노가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켜 볼 수 있는 역사가 되고, 그 역사의 마당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보면서 앞으로 또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 이것이 제주도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 국민들에게 이제 분노와 불신과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화해를 가르쳐주는 중요한 상징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함께 노력해 나갑시다. 감사합니다.

2006. 4. 3
대통령 노 무 현





사람들이 광주 민주화 항쟁만을 기억해주지 않길 바라며 연재를 마칩니다.
posted by Belle〃♬ 2007. 9. 27. 19:56
15. 공포는 아직 남아 있다.

연좌제의 고통도 심했다. 한 4.3 수형자의 증언이다.

"(내 옥살이 때문에) 친족간에도 미안한게 있어. 내가 그런 걸로 징역을 사니까 친족이 뭘 하나 하려고 해도 나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거라. 취직을 하려고 해도, (나 때문에) 그런 것도 못한 사람이 있어. 그런 거 보면 많이 미안하기도 하지. 사람이 징역을 살고 나왔으면, 그걸로 그만해야 하는데. 아이고, 징역 살고 오니까 그때부터 경찰이 출입했어. 집에 있으면 통지가 와. 서귀포경찰서에서. 조금 들어볼 말이 있으니까 와달라고 해. 가면 들어볼 말 개뿔도 없으면서 말야. 들어볼 말도 생전 없으면서 가면 '뭐하면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 '어디 다니느갸?' 이거라. 일년에 서너 차례씩은 했어. 노태우 시절까지도 그랬어."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감시와 추궁도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그래서 아예 사람이 있는 곳은 피해 버리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 가면 경찰에서 뒷조사를 하는 등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97년에도 '기억의 타살'은 끝나지 않았다. 김종민은 "마을의 온갖 사건들을 증언하던 한 노인은 정작 자신의 어머니가 희생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취재반이 다른 곳에서 그 사실을 알고 다시 확인하면 그제서야 실토를 했다"고 말했다.

"제주도의회 4.3특위가 희생자 조사를 벌일 때도 많은 유족들은 신고를 기피했다. 농민들보다는 공무원이나 사업가 등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일수록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이 겪었던 연좌제 피해 사례를 이야기하며 '자식에게만큼은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하면서, 연좌제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했다. 대부분의 유족들은 자기 부모가 배운 것 없는 촌로였음을 강조했다. 사상범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가 낳은 현상이다. 그리고 일부는 부모를 총살한 토벌대보다 '사태를 유발시킨' 무장대를 원망했다. 심지어 위령제 때 무장대로 추정되는 사람의 위패가 보인다면서 자기 부모의 위패를 거두어 가기도 했다. ...... 최근에도(97년 3월) 취재반은 증언 채록에 애를 먹었는데, 바로 '황장엽 리스트'가 연일 언론에 보도될 때였다. '세상이 다시 어지러워지면 내가 한 증언이 문제될 게 아니냐'는 걱정 때문이었다."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위원회(위원장 총리 고건)가 확정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유혈사태를 초래한 초토화작전 및 집단 인명피해(집단학살)의 최종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다고 지적했으며, 10월 31일 대통령 노무현은 사건 발생 55년 만에 당시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2006년 4월 3일, 58돌을 맞은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참석한 대통령 노무현은 추도사를 통해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됐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며, "오랜 세월 말로 다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뎌온 유가족들께 진심으로 위로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유족회 회장 김두연은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58년 만에 대통령이 직접 위령제 행사에 참석해 도민들에게 사과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라면서, "유족들의 한이 풀렸다"며 감격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12~214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9. 19. 18:02
14. 날조된 딱지와의 투쟁, 기억의 타살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뜻이 어떠했건, 그들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축하는 그 순간에도 제주 도민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제주도민들은 이승만 정권이 덧씌운 '빨갱이 섬' 이라는 날조된 딱지와의 투쟁을 전개해야 했다.

한수영이 지적했듯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 출신 청년들이 해병대에 무더기로 자원입대해 '귀신잡는 해병' 이라는 별명을 낳게 만든 것도 '빨갱이 섬' 혹은 '잠재적인 좌익분자들의 소굴' 이라는 바깥의 인상을 어떤 방법으로든 허물고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싶었던 제주 사람들의 생존의지 때문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학살극이 완료된 이후에도 제주도민들의 고통과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현기영은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했다.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30년 동안 단 한번도 고발되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 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 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 해서 30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 봐 두려웠다."

또 현기영은 "역대 독재정권들은 공포정치를 통하여 4.3을 금기의 영역에 묶어놓고, 그 사건에 대한 도민의 집단적 기억을 폭력적으로 말살하려고 했었다"며, "비참한 사건에 대한 도민의 집단적 기억을 말살하는 정치를 '망각의 정치'라고 한다"고 했다.

"이러한 기억의 타살행위는 반세기 동안 도민의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도민들은 그 참혹한 경험을 망각하지 않고는 도무지 살 수 없어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기억을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간의 내통이 철저히 봉쇄되고 말았으니, 살아남은 자 역시 살아 있되 기억이 타살당한 죽은 자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제민일보』 기자 김종민이 1988년 봄 생존자의 증언 채록에 나섰을때의 경험담이다.

"일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취재반을 문 앞에서 쫓아냈다. 어쩌다 할아버지가 증언을 할라치면 어느새 부엌에서 나온 할머니가 막았다. '이 하르방 또 잡혀 가려고 실없는 소리를 한다' 고. ...... 반발심도 '적당하게' 당해야 생기는 걸까. 체험자들은 철저하게 좌절해 패배주의에 빠져있었고 큰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모가 죽을 때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러야 했던 유족들은 진상규명 의지는커녕 '4.3'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꺼렸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10~212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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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9. 19. 17:42
13. 4.3의 배후엔 미국이 있었다.

48년 5.10선거에서 꼭 1년이 지난 49년 5월 10일 제주도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49년 5.10재선거를 치르고 돌아온 경찰대에게 국무총리 이범석은 환영사에서 "제주도의 완전 진압은 비단 대한민국에 대한 큰 충성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공산주의 독재로부터 방어하는 데 큰 공적이 있는 것"이라고 치하했다.

『조선중앙일보』 49년 9월 1일자는 "외국 기자들은 이 사태를 가리켜 가장 흥미롭기나 한 듯이 '마셜'과 '몰로토프'의 시험장이니, 미소 각축장이니, 38선의 축쇄판이니 하고 이곳 제주도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을 붓끝으로만 이리 왈 저리 왈 한 사실도 있었다"면서, 제주도는 "극동의 반공보루로써 새로운 시험장이 되어져 있는 것"이라고 썼다.

미국은 제주에서의 '인간 사냥'에 어느 정도 개입했던 것일까? 훗날 4.3 진압을 미군 장교가 직접 지휘했다는 미국 측 인사들의 증언도 나왔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진상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국이 '인간 사냥'을 방조 내지 부추켰다는 점이다. 미국은 왜 그랬을까?

그 이유에 대해 박명림은 '상황론'과 '음모론'을 제시했다. 상황론은 "철수에 앞서 친미반공 기지를 구축한다는 미군의 점령 목표가 여순사건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고, 제주도 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전율할 학살극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음로론은 "미군은 대공투쟁의 전초 기지로써 제주도에서 '고도로 의도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제주도의 군사적 기지로써의 가치에도 주목했으리라는 시각도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말기는 45년에 약 7만명의 병력을 제주도내에 주둔시켰다는 것, 46년 10월 AP통신이 제주도를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지브롤터에 비유했던 것, 47년 이승만의 제주도 미군기지 제공방언, 49년 대만 총통 장개석의 공군기지 설치 제안, 49년 10월 주한 미대사관 보고서에서 "전략상 엄청난 가치를 지닌 제주도"라고 거론한 점이 바로 제주도의 그런 군사전략적인 가치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미군의 제주항쟁에 대해 초토작전을 강핸한 건 본국 정부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은 당시 유엔에서 겪고 있던 곤경, 즉 한반도 문제 해결을 둘러싼 소련의 비난을 의식했다. 소련은 "미군정의 폭정에 대항해 주민들이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 좋은 예가 제주도 폭동사건"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관계자를 문책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폭도를 진압하라는 명령까지 하달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유엔의 한국정부 승인을 앞두고 정통성 문제로 번질까 봐 초강경 대응을 원했으니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8~210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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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lle〃♬ 2007. 9. 13. 17:57
12.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는다"

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주 4.3 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지시했다. 이승만을 총재로 모시고 있는 대한청년단은 이승만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김계순은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 온 한 처녀가 하귀 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대가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결국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라고 증언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한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들 한 번씩 찌르라고 했습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경찰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에게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 먹고 난리가 났어요. 또한 그 일로 몹시 앓았습니다. 사촌언니는 그때 찔렀다면서 그 후 막 아파서 죽다 살아났다는 겁니다.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들 나처럼 앓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앓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 안 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몸을 줬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7~208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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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lle〃♬ 2007. 9. 13. 17:47
11. 현기영의 『순이 삼촌』

현기영의 『순이 삼촌』에 기록된 내용도 눈물겹다.

"작전명령에 의해 소탕된 것은 거개가 노인과 아녀자들이었다. 그러니 군경 쪽에서 찾던 소위 도피자들도 못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다니! 또 도피 생활을 하느라고 마침 마을을 떠나 있어서 화를 면햇던 남정네들이 군경을 피해 다녔으니까 도피자가 틀림없겠지만 그들도 공비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공비에게도 쫓기고 군경에게도 쫓겨 할 수 없이 이리저리 피해 도망다니는 도피자일 따름이었다."

"이렇게 안팎으로 혹독하게 부대낀 마을 남정들 중에는 아버지처럼 여러 달 전에 밤중에 통통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해 버린 사람도 잇고 육지 전라도 땅으로 피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사내아이들을 다른 마을로 보내기도 했다. 그것도 큰놈은 읍내 이모네 집에, 샛놈(가운데 아들)은 함덕 외삼촌한테, 막내놈은 또 어디에 하는 식으로 사방에 뿔뿔이 흩어놓았다. 그건 아마도 한군데 모여 있다가 몰살되어 씨멸족하면 종자 하나 추리지 못할까봐 생각해낸 궁리였으리라."

"내 아래 또래의 아이들에게 몰래 양과자를 주어 아버니자 형이 숨은 곳을 가리켜 달라고 꾀어내던 서청 출신의 순경들, 철모르는 아이들은 대밭에서, 마루 밑에서, 외양간 밑이나 조짚가리 밑에 판 굴에서 여러번 제 아버지와 형을 가리켜냈다.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 살 노인을 닦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한다고 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꿇고 앉은 채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닭 잡아 내라고 공포를 빵빵 쏘아대기도 했다."

"그들은 또 여맹(女盟)이 뭣 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 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에 가입했다는 협의를 뒤집어씌우고 발가벗겨 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 지서에 붙을어다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갔는지 알아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갔으면 분명 그 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 거기다가 이들을 밭에서 혼자 김매는 젊은 여자만 보면 무조건 냅다 덮친다는 소문이었으니 나이 찬 딸을 둔 집에서는 이래저래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딸이 겁탈당하기를 기다리느니 미리 선수를 쳐서 서청 출신 군인에게 시집보낸 우리 할아버지의 처사는 백번 잘한 일이었다. 아직 스무 살 어린 나이에 별 분수를 모르던 고모부는 할아버지가 꾀로 얼르는 바람에 얼떨결에 결혼하고 만 것이었는데 고모는 고모부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5~207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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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lle〃♬ 2007. 9. 3. 13:24
10. 사살연습이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

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도 끔찍했다. 제2연대 3대대 중대 일부 병력이 북촌리를 통과하다가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30~300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300여채의 가옥을 잿더미로 만든 사건이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1쳔여 명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교단에 오른 현장 지휘자는 먼저 민보단 책임자를 나오도록 해서 '마을 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즉결처분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위협사격으로 30대 임산부와 두 살짜리 젖먹이를 안은 40대 여인들이 쓰러졌다. 많은 마을 주민들은 젖먹이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숨진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들어 젖을 빨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전한다. 군인들은 다시 군경 가족을 나오도록 해서 운동장 서쪽 편으로 따로 분리시켰다.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주민들 가운데는 군경 가족이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이 '사는 길'이라 여겨 필사적으로 달려나가다 개머리판으로 얻어터지거나 총상을 입기도 했다. 어린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던 군인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주민 몇십 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밭에서 사살하기 시작했다."

당시 2연대 3대대의 대대장 차량을 운전했던 김병석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대대장 차량은 임시로 앰뷸런스를 사용하고 있었어. 날씨가 추워서 나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고 6, 7명의 장교들이 앰뷸런스 뒤에서 참모회의를 가졌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했어. '학교 담 위에 대대 병력을 모아놓고 기총사살을 해야 한다', '대대 화기인 박격포를 이용해야 한다' 등 의견이 분분했지. 그때 한 장교가 '군대 들어와서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는 군인이 태반이다. 분대별로 길 건너 옴팡밭(길 아래쪽에 푹 꺼진 밭)으로 끌고 가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어. 모두 좋다고 했지. 동쪽 줄부터 끌고 가기 시작했어. 그때는 나도 혼이 다 나갔던 것 같애. 고향이 함덕리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는 인척관계도 있을 거고 동창들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아무 생각도 안났어."

60년 4.19 후 『조선일보』 60년 12월 22일자가 이 사건을 기사화했다. 이 기사는 <끔찍한 악몽, 과부(寡婦)의 마을...... 해마다 이맘 땐 집단제사> 라는 제목 아래 "남녀 유권자 비율을 따져보면 거의 3대 1에 가까울 만큼 남자들이 희소한 곳"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5.16쿠데타로 진상은 다시 파묻히고 말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4~205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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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8. 31. 02:28
9. '함정 토벌' '대살(代殺)' '이름 빼앗기지 마라'

집단 학살이 가장 극심했던 48년 12월 중순부터 약 열흘간 토벌대는 전과(戰果)를 입증받아 승진하기 위해 입산한 사람들을 총살한 후 목을 잘라 오기도 했다.

'함정 토벌' 또는 '자주 사건'도 있었다.

"토벌대는 무장대처럼 낡은 옷으로 변장해 민가에 들어가 '산에서 왔다'며 식량을 요구하거나 숨겨줄 것을 애원했다. 측은하게 여겨 밥을 주는 사람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 토벌대에게 총살되었다. 또한 여기저기서 소위 '자주 강연'이 열렸다. 토벌대는 주민에게 '과거에 조금이라도 산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면 자수해 편히 살라'고 했다. 이미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거나 자수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협박이 뒤따랐다. 사태 초기 무장대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을때 주민들 어느 누구도 무장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옷가지를 올렸고 쌀 한 되 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나 둘 자수자가 나오자 토벌대는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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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원 화집 "동백꽃 지다" 중 '공격-탄압이면 항쟁이다'



'대살(代殺)' 이라는 것도 있었다. 가족 중 청년이 사라진 집안의 사람들은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하는 것이다. 48년 12월 13일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 주민 48명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이 마을에서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총살극을 구경시켰다 하여 이 사건을 '관광총살' 이라고도 부른다.

'이름 빼앗기지 마라'는 유행어도 나돌았다. 토벌대의 고문이 워낙 가혹해 일단 취조를 받으면 허위로라도 자백해야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원면 신례리 양경수 씨(78)는 당시 '이름 빼앗기지 마라'는 유행어가 있었다고 말했다. 우연히 토벌대에게 끌려가는 사람의 앞에 가거나 근처에 있다가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의 존재를 남기지 말라는 뜻이다. '매에는 장사가 없어 고문을 받으면 아무 이름이나 튀어나오는 법' 이라고 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2~204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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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8. 26. 12:14
8. 토벌대의 집단 광기

초토화 작전 기간 중에서도 48년 12월 중순부터 약 열흘간 집단학살이 가장 극심했다. 김종민은 "이 시기 토벌대의 행태는 마치 총살시킬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광분한 듯 보인다"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와 관련, 한 미군 보고서는 9연대의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를 '수준 높은 작전을 펼치려는 욕망과 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 기록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 이라고 분석했다(『G-2 보고서』, 1948. 12. 17). 당시 제주 주둔 9연대는 12월 말로 2연대와 교체하기로 되어 있었다.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여순사건 진압을 완수했던 2연대의 성과에 맞서기 위해 '전과' 올리기에 열을 냈다는 분석이다."

12월 말 제주 주둔 토벌대가 9연대(연대장 송요찬)에서 2연대(연대장 함병선)로 교체되면서 서청도 더욱 기승을 부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 광기'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완전한 언론통제 때문이었다.

열세 살 소년을 고문해서 죽게 만든 사건의 48년 9월 15일자 중앙 신문들에 보도된 이후 언론마저 토벌대의 토벌 대상이 되었다. 48년 10월 『경향신문』 제주지사장 현인하와 『서울신문』 제주지사장 이상희가 끌려가 처형당했으며,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정과 전무가 끌려갔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는데, 누가 감히 목숨 걸고 제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밖에 상세히 알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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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4.3사건지원사업소가 발굴한 4.3사건 당시 희생자 유해 3구



사실 '집단 광기'의 조짐은 사태 초기부터 있었다. 김종민에 따르면, "처음엔 '말 태우기'와 '뺨 때리기'가 유행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돌게 했다. 또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머뭇거리거나 살살 때리면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심지어는 총살에 앞서 총살자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 부모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표선면 가시리 안공림 씨(58)는 여덟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던 끔찍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도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 했다'고 했다...... 미친 짓거리는 점점 심해져 갔다. 연행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한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뺨 때리게 하기'는 오라리 방화사건 때 벌어진 일이었는데, 고은은 <오라리>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 담배꽁초를 던졌다 / 침 뱉었다 / 오라리 마을 /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 할아버지 때귀 갈겨봐 / 손자는 불응했다 /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 세게 때려 이 새끼야/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 세게 찼다 / 영감 손자 때려봐 /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 세게 쳐 / 세게 쳤다 /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 울면서 / 서로 따귀를 쳤다 / 빨갱이 할아버지가 / 빨갱이 손자를 치고 /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 이게 바로 빨갱이 놀이다 봐라 / 그 뒤 총소리가 났다 / 할아버지 임차순과 / 손자 임경표 / 더 이상 /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 총소리 뒤 /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0~202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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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8. 11. 22:59
7. 서청의 착취와 '민보단 강요'

여순사건 직후 48년 11~12월 두 달 사이에 최소한 1천 명 이상의 서북쳥년회 단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으로 급히 옷을 갈아입고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일엔 이승만이 앞장섰다. 미군의 48년 12월 6일자 보고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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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부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 서북청년단원들이 한국군에 6천500명, 국립경찰에 1천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한 지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 간의 상호합의에 따라, 서북청년회는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단 경위 1명, 200명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

이승만은 12월 10일 서북청년회 총회에 참석해 "제주도 4.3사태와 여수,순천 반란사태로 전국이 초비상사태로 돌입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회를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사상이 건전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며 서청의 제주 파견을 앞장서서 독려했는데, 여기엔 미군도 가세했다. 미군 보고서는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를 지원하게 된 것은 몇몇 미군 장교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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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 단원들은 '특별 중대(elite company)'라는 특수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이들에겐 군 내부의 '반대자 색출' 이라는 헌병 기능까지 부여되었다. 그러나 정작 줘야 할 건 주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서청 대원들을 대거 경찰이나 군인으로 내려보내면서 월급이나 보급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현지 조달하라는 식으로 내몰았으며, "제주도민들은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다. 대부분이 빨갱이 물이 들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상이 건전한 서청이 이곳을 진압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입시켰다.

서청 단원들은 3.1사건 직후부터 제주에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그때부터 경찰과 더불어 민중을 착취하는 길로 들어섰다. 김종민에 따르면,

"당초 서청은 민간인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처음엔 주로 엿장수를 하다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이승만의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로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은 총살되었다. 서청의 위세는 너무도 커서 제주 출신은 경찰조차 꼼짝 못했다."

이승만 정권의 의도된 서청의 착취행위 조장의 결과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서청의 악탈행위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그걸 감내하든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구도로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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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사람 피쟁이(백정) 서북청년단들, 다 사람백정이지, ...... 순 엿장수나 하던 무식한 것들이었지. ...... 매일 소 한마리 말 한마리 잡으라 하고, 조금만 거슬리면 잡아다가 총대가리로 때리고, 죽였지. ...... 시계 달라고 해서 안 주면 죽여 버렸지. 낮에는 일 시키고 밤에는 대총 들고 보초 서고 ...... 징그럽고 억울하게 그 빌어먹을 놈들의 종노릇 하며 생명까지 바치며 산 우리들. 우리들끼리 올며 분노하며 한탄하며 살았지. 산목숨으로 산 게 아니었지. 지옥살이 하듯 죽지못해 살았지. ...... 그래 살기 위해 싸우기 위해 산으로 갔지."

제주도민에 대한 착취엔 '민보단 강요'까지 가세하였다. 5.10선거에서 맹활약한 향보단은 48년 5월 22일에 해산되었지만, 이는 6월 민보단(民保團)으로 부활하였다. 제주도에선 8월 11일에 민보단이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경찰의 외곽조직으로 군경 진압작전에 동원되었다. 보초를 서는 일과 더불어 토벌작전시 죽창 등의 무기를 들고 군인이나 경찰관보다 앞서가는 총알받이 역할을 해야 했다.

제주 민보단은 5만명 규모였는데, 소집할 청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중엔 남녀노소 모두에게 민보단의 이름 아래 동원 의무가 부여되었다. 민보단에 대한 미군의 한심한 보고서는 무지가 지나쳐 완전히 조롱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미군 보고서 49년 4월 1일자는 "제주도 남자들은 농사일보다는 보초를 서거나 토벌전에 나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기록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97~199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