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9. 27. 19:56
15. 공포는 아직 남아 있다.

연좌제의 고통도 심했다. 한 4.3 수형자의 증언이다.

"(내 옥살이 때문에) 친족간에도 미안한게 있어. 내가 그런 걸로 징역을 사니까 친족이 뭘 하나 하려고 해도 나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거라. 취직을 하려고 해도, (나 때문에) 그런 것도 못한 사람이 있어. 그런 거 보면 많이 미안하기도 하지. 사람이 징역을 살고 나왔으면, 그걸로 그만해야 하는데. 아이고, 징역 살고 오니까 그때부터 경찰이 출입했어. 집에 있으면 통지가 와. 서귀포경찰서에서. 조금 들어볼 말이 있으니까 와달라고 해. 가면 들어볼 말 개뿔도 없으면서 말야. 들어볼 말도 생전 없으면서 가면 '뭐하면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 '어디 다니느갸?' 이거라. 일년에 서너 차례씩은 했어. 노태우 시절까지도 그랬어."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감시와 추궁도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그래서 아예 사람이 있는 곳은 피해 버리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 가면 경찰에서 뒷조사를 하는 등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97년에도 '기억의 타살'은 끝나지 않았다. 김종민은 "마을의 온갖 사건들을 증언하던 한 노인은 정작 자신의 어머니가 희생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취재반이 다른 곳에서 그 사실을 알고 다시 확인하면 그제서야 실토를 했다"고 말했다.

"제주도의회 4.3특위가 희생자 조사를 벌일 때도 많은 유족들은 신고를 기피했다. 농민들보다는 공무원이나 사업가 등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일수록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이 겪었던 연좌제 피해 사례를 이야기하며 '자식에게만큼은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하면서, 연좌제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했다. 대부분의 유족들은 자기 부모가 배운 것 없는 촌로였음을 강조했다. 사상범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가 낳은 현상이다. 그리고 일부는 부모를 총살한 토벌대보다 '사태를 유발시킨' 무장대를 원망했다. 심지어 위령제 때 무장대로 추정되는 사람의 위패가 보인다면서 자기 부모의 위패를 거두어 가기도 했다. ...... 최근에도(97년 3월) 취재반은 증언 채록에 애를 먹었는데, 바로 '황장엽 리스트'가 연일 언론에 보도될 때였다. '세상이 다시 어지러워지면 내가 한 증언이 문제될 게 아니냐'는 걱정 때문이었다."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위원회(위원장 총리 고건)가 확정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유혈사태를 초래한 초토화작전 및 집단 인명피해(집단학살)의 최종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다고 지적했으며, 10월 31일 대통령 노무현은 사건 발생 55년 만에 당시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2006년 4월 3일, 58돌을 맞은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참석한 대통령 노무현은 추도사를 통해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됐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며, "오랜 세월 말로 다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뎌온 유가족들께 진심으로 위로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유족회 회장 김두연은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58년 만에 대통령이 직접 위령제 행사에 참석해 도민들에게 사과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라면서, "유족들의 한이 풀렸다"며 감격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12~214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