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21. 13:59

조병옥과 이시언의 고언(苦言)


이 사건은 『뉴욕타임스』 등 외국 언론의 보도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데다 이미 일어난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국회의 중간 보고가 1951년 4월 25일로 예정돼 있던 터라, 이승만은 4월 24일 국무회의를 소집하고선 자기 나름대론 비상한 대책을 발표하였다.


"정부 장관들은 서로 협력해서 일을 해야 하는 법이오. 거창 사건을 두고 내무·법무·국방 3부 장관들이 서로 협력하지 아니한 까닭에 대한민국의 체면이 손상당했소. 그러므로 3부 장관은 사임해야겠소."


평소 이승만을 '선생님'이라고 불러 온 조병옥은 "선생님, 저는 즉시 사임하겠습니다만, 국무위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사임하려는데 발언해도 좋겠습니까"라고 허락을 얻은 뒤 이렇게 말했다.


"정부 12부 중 11부 장관은 서로 협력해서 일을 잘하고 있습니다. 다만 신성모 국방부장관만이 협력을 않는 실정입니다. 이번 거창 사건도 순전히 있는 사실을 없다고 복명서를 꾸며 대통령께 보고하여 조사 시일을 끌었던 까닭에 국가의 위신이 손상되었으며 거창 사건을 발생케 한 장본인이 군인인 까닭에 그 책임은 오로지 신 국방부장관에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조병옥은 이 말을 하고 국무회의장을 나가 사표를 쓰고 떠났다. 장문의 사표였다.


"본인이 대통령의 명에 의거해 사표를 제출하는 바 각하를 보좌하던 국무위원 1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충언을 올리고 내무부장관의 자리를 물러납니다. 첫째, 행정은 제도상으로 운영되어야 할 것이며 개인의 의욕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둘째, 정치는 재인(在人)이니 양심적이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십시오. 셋째,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로 탄생했으므로 반드시 민주국가로 성장 발전하여야 됩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일보라도 민주주의로부터 후퇴할 때에는 자유세계로부터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김준연도 즉시 사직서를 냈지만, 신성모는 미적거리며 자신의 구명 연판장을 돌리게 하였다. 3군총사령관을 비롯하여 각 일선 사단장급들이 신성모의 국방부장관 유임을 진정하였고, 신성모는 계속 군지휘관회의를 주재하엿다.


신성모는 김종원에게 국회 조사단의 현지 접근을 막으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김종원은 예하 장병을 공비로 가장시켜 국회 조사단에게 위협사격을 가해 내쫓는 짓까지 저질렀다. 이것이 정치 문제가 되고 5월 들어 진상이 밝혀졌지만, 이승만은 이들을 계속 비호하였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부에 몸담고 있는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길 일이었다. 5월 9일 부통령 이시영은 이승만의 파탄을 비판하는 동시에 자신의 무능과 자괴감 등을 담은 '국민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회에 사의를 표했다.


"탐관오리는 도처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앙을 실추케 하고 정부의 위신을 손상케 하며 신생 대한민국의 장래에 암영을 던져주고, 누가 참다운 애국자인지 흑백과 옥석을 가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과거 3년동안 아무런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돌아가 국민과 더불어 고락과 생사를 같이하려 한다. ······ 선량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국정감사를 더욱 철저히 하여 이도(吏道, 벼슬아치의 도리)에 어긋난 관료들을 적발·규탄하되, 모든 부정 사건에 적극적 조치를 취해 국민의 의혹을 석연히 풀어주기 바란다."


국회에선 재석 131명 중 115명이 사임에 반대해 사임서를 반려했지만 이시영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국회의 각파 대표들은 이승만을 방문해 이시영의 사임을 만류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승만은 "부통령이 현 정부를 만족하게 생각지 않아서 나가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며 거절했다.


5월 15일 국회는 제2대 부통령으로 김성수를 선출하였다. 김성수는 78표(51%)를 얻어 당선되었다.(사임을 원한 이시영에게도 73표가 나왔다)




이승만의 특정인 총애


이승만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여론이 악화되자 1951년 5월 5일에서야 신성모를 국방부장관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기붕을 장관에 임명하였지만, 아직 신성모에 대한 애정까지 접은 건 아니었다. 이승만은 6월 26일 국무회의에서 "신성모를 주일 한국대표로 임명하는데 찬성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주시오"라고 말했다. 이미 6월 23일에 신성모의 임명에 관해 일본에까지 통보해놓고 벌인 연극이었다. 김성수는 단호하게 반대하였으며, 어느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이승만을 결정을 재고하도록 요구하면서 오전 회의를 종료했다. 오후 회의에 김성수는 불참했고, 신성모의 주일 한국대표 임명 건은 4대 6으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결과를 무시하고 신성모를 임명했다. 김성수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아 앓아 눕게 된다.


거창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단의 보고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학살을 저지른 제3대대가 합동작전 때 받은 작전명령 부록에는 "작전 지역 내 인원들을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 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는 소각하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문제되자 11사단 본부는 원래의 작전명령을 회수하고 "작전 지역 내 주민들 가운데 이적 행위를 한 자들은 간이 군법회의에 의해서 처단하라"는 내용으로 변조된 작전명령을 내렸다.


8월 6일 군법회의 제5회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두한 김종원은 "작전명령이 변조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며, 이는 국방부장관과 참모총장으로부터 이 사건이 확대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지시를 받고 자신이 주동이되어 꾸민 것이었다"고 밝혔다. 또 그는 합동조사단의 피습 사건도 "공비의 소행이 아니라 자신이 제9연대의 병력을 조사단의 길목에 배치시켜 따발총으로 위협사격하게 하여 조사를 호위하던 무장 경관이 부상을 당한 것처럼 꾸몄다"고 진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모는 이승만의 총애에 의해 면책되었다. 군법회의는 연대장 오익경에게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년,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이들은 사면을 받고 복권되었다.


거창 사건을 일으킨 제3대대에 한 통역 장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리영희였다. 그는 사건 발생 훨씬 후에야 이 사건을 알게 되었고, 축소된 학살 규모의 진상은 수십 년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그는 훗날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쟁터에서 지휘관과 (미국) 고문관을 따라다니기만 하는 것으로 소임을 삼았거나, 안전한 후방만을 골라서 근무하는데 재주를 부렸다면 거창 사건 희생자 719명과 그 유족들에게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죄책감으로 느낄 필요가 없다. '나는 모르는 일, 내 소임 밖의 일'이라는 한마디로 이 사건을 오래전에 잊어버렸을 것이다. 어째서 이 나라는 인간 말살의 범죄가 '공비'나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이처럼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 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이데올로기의 광신 사상과 휴머니즘에 대한 멸시를 깨쳐야겠다는 강렬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낀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의 '잔인성'을 나무라는 데 동조하지 않게 되었다. 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장 한동석 소령, 그리고 제11사단장 최덕신 소장은, 거창 사건 후, 우리 사단이 지리산 작전을 제8사단에 인계하고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도중 군법회의가 회부되어 부대를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1년도 복역하지 않고 석방되었다. 광신적 반공주의, 전쟁과 군대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때부터 더욱 달라져 갔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7. 16:00

규명되지 않은 정치자금 조성 의혹


1951년 7월 5일 방위군 사령부가 있던 대구 동인국민학교 강당에서 열린 육군고등군법회의장에는 물론 교정에까지 방청객이 꽉 차 고성능 마이크까지 가설했다. 검찰관인 중령 김태청은 추상과 같은 논고를 폈다.


"휘하 장병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 순간에도 그들은 따뜻한 요정에서 기생을 옆에 끼고 양주 가효(맛 좋은 안주)로써 유흥삼매하였던 것이니, 이로 인해 이름 모를 언덕에 원혼이 된 애국 장정의 수는 또한 얼마나 되겠습니까? ······ 피고인에게 묻노니 그대들 귀에는 이 삼천만 민족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 공개 법정에는 전 육군참모총장인 소장 정일권도 증인으로 출정하였다. 김태청은 정일권을 향해 무슨 이유로 일등병 경험조차 없는 김윤근이 준장과 사령관이 되었는가를 비롯해 다섯 항목의 질문을 던졌다. 정일권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두가 이승만의 명령이었다고 대답했다. 전시 특명검열관인 준장 김석원은 정일권의 답변을 '책임회피'로 판정하고, 퇴장하는 정일권에게 다가서서 "이봐, 지금의 답변이 그게 뭔가. 당장 견장을 떼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석원은 달려온 장교에게 제지되었고, 정일권은 말없이 사라졌다.


1951년 7월 19일 김윤근·윤익헌·강석한·박창원·박기환 등 5명은 사형을 당했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김윤근을 외국으로 빼돌릴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대구 교외의 야산에서 이루어진 총살형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처형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은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처형 집행 후 국민방위군 간부들에 의해 부정 처분된 예산이 이승만 정부와 정부 고위층에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어 정치 쟁점화 되었다. 국회의원 김종회는 국민방위군용 군수물자를 부산으로 유출, 3억여 원을 횡령하여 이를 이승만의 비서에게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는 폭로를 하였고, 국민방위군 예산이 국회 내 이승만 지지 세력 및 정부 고위층, 군부 내의 간부 등에 정치자금으로 유출되거나 뇌물로 상납되었다는 주장들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들이 너무 일찍 처형됨으로써 많은 의문을 남긴 채 종결되고 말았다. 한홍구에 따르면,


"당시의 관찰자들은 국민방위군 사건은 단지 정부의 준비 부족이나 방위군 지휘부의 예산 횡령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성모가 이승만 이후를 노려 자기의 정치적 지지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대한청년단 출신들이 많이 포진한 신정동지회라는 단체를 후원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예산을 빼달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군 병사는 죽을 때 '빽'하고 죽는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승만 정권에서 저질러진 총체적 부패구조의 완결판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 부패구조는 단지 불법적으로는 돈을 먹는다든가 하는 차원을 떠나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분노라는 것도 웬만한 수준이 되어야 터뜨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김동춘은 국민방위군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국가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전쟁 상황에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도 장정으로 끌려간 것이 몹시 주변머리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야릇한 부끄러움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 부재'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인민군과 국군 가운데 어느 쪽으로 징집되더라도 그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저 도망가서 일신의 생을 도모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공권력의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지탱하는 일에 대해 누구도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된다. 국민들은 지금도 돈 있고 배운 사람들은 다 외국으로 도망가고, 못 배우고 없는 사람들만 나가 싸우다 죽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죽으면서도 '빽' 하고 죽었다고 한다.


왜 '빽' 하고 죽었을까? 홍성원의 해설을 더 들어보자.


"한국 병사는 전방에서 전투 중에 전사할 때 '어머니'를 부르는 대신 '빽' 하고 죽는다고 한다. 그는 백이 없어서 안전한 후방으로 못 빠지고 최전방 고지에서 적탄을 맞아 죽게 되었다. 자기의 죽음이 백 때문임을 알고 그는 백에 원한이 사무쳐서 최후의 순간에도 '빽' 하고 죽는다는 이야기다."


서중석은 임시 수도 부산에서 주전론은 애국이요, 반전론은 매국으로 규정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전론자들은 전장에는 남의 자식들이 나가서 싸워 이겨주고, 나는 돈이나 벌어보자는 식이었다.


"권력을 쥔 자, 가진 자들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고, 보낸다 하더라도 안전한 후방에 배치되도록 '빽'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대학은 징집 면제를 받으려는 학생들의 은신처로 되어 ······ 군대는 주로 못살고 힘없는 농민의 자식들이 갔다."


백마부대장 김운기의 회고다.


"각종 전투를 하면서 부를 누리고 권세 있는 집안의 자식이 군에 들어왔다는 말은 과문한 탓인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리영희도 일선에서 그런 부패상을 원 없이 목격했다. 가지고 배운 집자식들은 일선에서 후방으로 빠지고 목숨 걸고 싸우러 가는 군인들은 죄다 가난하고 못 배운 집 자식들이었다.


"학교깨나 다닌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가고, 이 틀림없는 죽음의 계곡에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 나라의 불쌍한 자식들만이 보내지는가? 나라 사랑은 힘없는 자들만이 하는 것인가? 전쟁과 군대를 알게 될수록 나는 점점 더 사색적으로 되어 갔다. 그럴수록 이 나라의 기본부터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6. 15:47

김윤근·신성모·이승만의 적반하장


이 '해골의 행렬'을 목격한 야당 의원들에 의해 국회에서 1951년 1월 15일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은 1월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백만 국민병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음은 실로 유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제2국민병의 참상에 대한 비난을 불순분자의 선동이라고 몰아붙였다. 국회에 출석한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제5열의 책동에 동요하지 말기 바란다"고 훈시하였다.


국회는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성모는 "국방부장관의 책임하에 있는 본 사건의 책임자 김윤근을 국회에서 조사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 최종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기 때문에 신성모가 방패막이를 자임하고 나섰을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민방위군 부대의 운영을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청년방위대에 맡겼기 때문에 저질러진 것이었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은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 등 청년단 간부들도 대령,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김종오에 따르면, "원래 김윤근은 씨름꾼 출신으로 일제 때 일본군 사병으로 복무했는데 해방이 되자 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6·25를 전후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되었다. 김윤근이 저지른 방위군 사건을 문제삼아 국회가 신성모 장관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 대통령은 '강을 건너다 말을 바꾸어 탈 수 없어!'라고 일축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신성모는 수사를 방해하다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사위인 김윤근은 빼돌리고 부사령관 윤익헌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래서 군사법정을 구성하면서 자신의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을 재판장에 임명하였다. 이선근은 신성모의 뜻을 받들어 재판 개시 3일만에 서둘러 김윤근에게 무죄,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도 하는 수 없이 타협책을 강구했다. 국회진상 조사단의 중간 보고가 4월 25일로 국방부장관 신성모, 내무부장관 조병옥, 법무부장관 김준연을 사임시키는 내각 개편과 동시에 국회에서의 방위군 사건 중간 보고 발표의 중지를 요청하면서 사건의 확산을 무마하려고 했다. 3부 장관 사임은 2월에 일어난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이승만으로선 동시에 터진 두 가지 큰 사건으로 수세에 몰리자 어떻게해서든 국면 전환을 꾀하고자 했을 것이다.




방위군 고위층의 거대한 예산 착복


그러나 진상조사 위원이었던 의원 서민호는 예정대로 중간 보고를 강행했다. 그는 보고를 통해 "그 동안 말하면 죽인다는 협박을 수없이 받으나 전혀 불순한 동기가 없음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한다"고 전제하면서, 방위군 간부들 대부분이 정치에 개입했으며, 상부의 명령임을 빙자하여 예산을 함부로 착복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이 보고에 따르면, 1950년 12월 17일부터 3월 30일까지 105일 동안 연 병력 7천58만2천940명의 유령 병력을 조작해서 모두 23억5천100여 만 원의 현금이 부정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방위군 사령부에서 제시한 통계를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식료품비의 조달 액수와 실제로 집행된 액수의 차이가 무려 20억 원에 달함으로써 결국 3개월 동안 55억원을 방위군 고위층들이 착복했다. 부사령관에 대한 기밀비용이 105일 동안에 무려 3억1천755만 원이나 지출되었고, 국회 내의 관련된 정파에 1억 원이나 흘러간 것 등 거대하고 복잡한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규명하려면 앞으로 최소한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보고 5일만인 4월 30일 '국민방위군 설치법 및 비상시 향토방위령의 폐지에 관한 법률안'이 상정되어 통과되었다. '해골의 행렬'을 시켜놓곤 이제 귀향하라는 것이었다. 신석상의 『신의 바람』에 따르면,


"그런데 이번에는 목적지 진주에 당도하자마자 해산을 시키면서 귀향하라니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어디 또 있겠는가. ······ '아냐, 나는 국민방위군의 책임자들을 다 고발할 거다. 군인을 모집해 놓고 거지를 만들어 귀향시킨 그놈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이냐. 또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매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으냔 말야.'"


최종 책임자는 이승만이었으나 이승만에 대한 고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윤근과 그 일행이 죽어줘야 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데다 그런 효과를 위해 재판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국방부장관이 5월5일 신성모에서 이기붕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기붕은 장관에 임명되고 나서 이 사건의 재심을 명했던 것이다. 이기붕은 이 일로 '인기가 급상승'하여 '이승만의 후계자로 부상'하게 되지만, 훗날 역사는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는 걸 보여주게 된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5. 23:18

천인공노할 사건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정부는 1950년 11월 20일 6·25 이후 방위군으로 조직된 청년방위대를 국민방위군으로 대치시키기 위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법안의 주요 내용은 ①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들을 제2국민병에 편입시킨다, ②제2국민병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킨다, ③육군참모총장은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 감독한다 등이었다.


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돼 소집된 국민방위군 중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5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기막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조차 이 사건을 "9만 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아사·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할 것인가? 놀랍게도 이들은 걸어서 혹한의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다. 징집된 사람들은 군복을 줄 줄 알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으로 나왔는데, 아무것도 주질 않았으니 얼어 죽으라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다. 동사·아사·병사·낙오자들이 속출하는데도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이들을 가리켜 나온 '죽음의 행렬' 또는 '해골의 행렬' 이란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들 중 일부는 경상남도와 북도의 교육대에 수용되었고, 일부는 제주도로 옮겨졌지만, 수용되지 못한 장정들은 노상의 거지 신세가 돼 해골 모습을 해가면서 계속 죽어 나갔다.


이의를 제기하면 돌아오는 건 몰매뿐이었다. 신석상의 소설 『신의 바람』은 그 비참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정확하게 헤아리 수조차 없는 나날을 행군으로만 계속했던 국민방위군들이었다. 엄동설한에 낮에는 걷고, 밤에는 국민학교나 중학교의 강당이나 교실에서 잠을 재운 인솔자들은 청년들에게 주먹밥을 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 몇날 며칠을 그렇게 먹였고, 그렇게 잠을 재웠으니 견뎌낼 장사가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아온 수백 수천의 장정들은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되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어야 했다. ······ 이따위가 무슨 국민방위군이냐고 투덜대다가 인솔자에게 발각되면, 그냥 간첩으로 몰려 죽어도 속수무책이었다. ······ "몇백 리를 행군하다 보면, 동상에 걸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낙오되는 환자들 때리는 인솔자놈이었습니다. 시계나 금반지를 빼주면 슬그머니 눈을 감아줍니다. 그러니 성한 놈들인들 왜 그짓을 못하겠습니까. 돈을 받고도 많이 빼주었어요. 모집한 장병들을 강당이나 교실에서 자게 하고는, 제놈들은 술집으로 나가 술을 마셨어요. 장교나 사병들이 모두 한통속이었어요. 그러니 죽어나는 것은 우리들뿐이었지요." "불평불만을 터뜨렸다가 빨갱이로 몰려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구요."




리영희의 증언


당시 육군 통역 장교였던 리영희는 이 사건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예비병력으로서의 국민방위군의 최종 남하 목적지의 하나가 진주였다. 진주에 주둔한 날부터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국민방위군 청장년들의 행렬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되었는지 그 수는 지금 기억하지 못하지만 만 명은 훨씬 넘었다. 진주시내의 각종 학교 건물과 운동장은 해골같은 인간들로 꽉 들어찼다. 인간이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느닷없이 끌려 나온 그들의 옷은 누더기가 되고, 천릿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에 신발은 헤어져 맨발로 얼음길을 밟고 있었다. 혹시 몇 가지 몸에 지녔던 것이 있었더라도 굶주림 때문에 감자 한 알, 무우 한 개와 바꾸어 먹은 지 오래여서 몸에 지닌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리영희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실 안에서 수용된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교실이 작은 틈도 없이 채워진 뒤에 다다른 형제들은 엄동설한에 운동장에서 몸에 걸친 것 하나로 새워야 했다. 누운 해 일어나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죽으면 그대로 거적에 씌워지지도 않은 채 끌려 나갔다. 시체에 씌워줄 거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이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도,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초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5. 00:32

군경 조직의 강화


군 내부의 숙군(肅軍) 바람은 국가보안법이 조장한 사회적 분위기에 자극되어 더욱 거세졌다. 그 분위기를 타고 1949년 1월 2일 육군정보국에 특별수사과 및 그 예하의 15개 지역파견대를 설치하였고, 1949년 10월 21에는 육군특무부대를 창설하였다.


그렇게 압박이 조여 오는 만큼 좌익계 군인들의 반란 및 퇴출 시도도 잇따랐다. 국가보안법이 공포된 다음날인 1948년 12월 2일에는 대구 6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관련자 590명이 체포되었다. 49년 전반기엔 육군 대대장(소령) 2명이 47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월북했으며, 공군 조종사 2명은 비행기를 타고 월북했는가 하면, 해상에서는 좌익인사들이 해군 함장과 미국 상선을 납치해 월북하는 사건들이 벌어졌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기존의 군과 경찰력 강화 프로그램을 더욱 강화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47년 말 경비대는 1만 7천 명 수준이었으나 48년 여름에는 5만 명, 49년 초엔 6만 5천 명으로 증강되었다. 이제 더이상 경비대는 아니었다.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국군에 편입됐고, 9월 5일에 각기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1월 30일 국군조직법이 공포된 뒤 12월 15일 국군이 정식 법제회되었기 때문이다. 경찰력도 47년 7~8월에 2만 8천 명 수준이었으나 48년 초 3만 명, 49년 3월에는 4만 5천 명으로 증강되었다.




"광무신문지법은 유효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까지 해방정국의 언론계엔 좌우 갈등이 치열했고 그 와중에서 테러도 난무했지만, 이제 국가보안법 체제하에선 그런 갈등은 먼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이미 정부 수립 일주일 전인 8월 9일 미 군정청 정무부장 조병옥을 통해 일제 시대의 언론통제법인 '광무신문지법'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구 후 9월 3일 『부산일보』의 간부와 기자를 신문지법과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 9월 13일 『제일신문』의 간부사원 10여 명 검거, 9월 15일 『조선중앙일보』의 간부들 검거, 9월 18일 『세계일보』의 간부 7명 검거와 함께 세 신문이 정간을 당하는 사건들이 있었다. 이제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성일보』 등 4대 우익지들이 주류 언론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그러나 우익 신문들도 더 이상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우익지들은 친여지, 친야지로 분류되었으며, 친야지는 새로운 탄압을 각오해야 했다.


9월 22일 7개항의 언론단속 지침이 발표되었다. 이 지침은 대한민국의 국시와 정부 시책을 위반하는 기사, 정부를 모략하는 기사, 공산당과 이북 북괴정권을 인정하거나 비호하는 기사, 국가의 기밀을 누설하는 기사 등의 게재를 금지시켰다.


이 7개 조항 지침도 큰 문제였지만, 12월 1일에 공포된 국가보안법은 언론의 자유를 더 위축시켰다. 49년 5월까지 7개 일간지와 1개 통신사가 폐간 및 폐쇄당했으며, 많은 기자들이 체포되었고 발행인 및 편집자들이 제거되었다.


방송은 아예 정부의 산하로 들어가 국영방송이 되었다. 미군정은 1948년 6월 1일 방송국을 조선방송협회에 돌려주었으며, 조선방송협회는 8월 6일 대한방송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나 다음날 8월 7일 국회를 통과한 정부조직법에서 방송국이 정부의 하부 조직으로 흡수돼 '대한민국 공보처 방송국'으로 국영화되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3. 14:45

국가보안법 찬반 논쟁


여순사건이 거의 진압되어 가던 1948년 9월 29일 잠자코 있던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다시 등장하여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은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아주 모호해서 정권이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다.


국회에선 한반 논쟁이 벌어졌다. 

야당 국회의원 조현영은 이렇게 말했다.


"속담에 고양이가 쥐를 못 잡고 씨암탉을 잡는다는 격으로 이 법률을 발표하고 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 일본놈 시대와 같이 잡아다 물 먹이고 이놈 자식이 그랬지 하면 예예 그랬습니다. 이래서 거기 다 걸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정치적 행동 하는 사람은 다 걸려 들어갈 수 있는 이런 위험도 있으니까 우리가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약을 꼭 써야 하면 분량을 맞추어서 써야 하는데 이 법안은 분량이 맞지 않습니다."


김옥주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보안법은 포악무도한 일제 침략주의의 흉검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유지법과 똑같은 비민주적 제국주의 잔재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하는 이 마당에 ······ 제국주의 잔재 폐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반면 찬성파인 박순석은 "농사짓는 농민은 피를 압니다. 피를 한 포기 뽑자면 나락을 다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피를 안 뽑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주장했다.


법무장관 권승렬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건국을 방해하는 사람하고 건국을 유지하려는 사람하고 총·칼이 왔다갔다하고 하루에 피를 많이 흘립니다. 즉 국가보안법은 총하고 탄환입니다. ······ 이것은 물론 평화 시기의 법안은 아닙니다. 비상시기의 비상조치니까 이런 경우에 인권옹호상 조금 손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가불 건국에 이바지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11월 14일자 사설 <국가보안법을 배격함>은 국가보안법이 "크게 우려할 악법이 될 것"이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捕殺)해야 돼"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연합에 의하여 1948년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되었다. 이제 통일 논의 자체가 어럽게 되었다. 북측에 무엇을 제안한다거나 남북회담을 하자거나 합작을 하자는 것도 국가보안법에 따라 처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가장 원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당시 법무부 검찰국 초대 검찰과장 겸 고검 검사로서 '빨갱이 잡는 검사'로 이름을 날린 선우종원에게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捕殺)해야 돼"라고 격려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장택상이 즐겨 던지던 질문이 하나 있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세 사람이 누군지 아나?" 답은 "이승만, 나 그리고 김두한이야"였다. '빨갱이 사냥'에 있어서 세 사람은 상중하 역할 분담이 잘 이루어진 삼위일체였던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곧 괴력을 발휘하였다. 외무장관 장택상이 유엔한국위원단에게 제시한 통계에 따르면, 1949년 4월까지 국가보안법으로만 체포된 숫자는 8만 9천700여 명이었다. 49년 한 해에만 체포된 인원은 11만 명 이상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