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15. 23:18

천인공노할 사건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정부는 1950년 11월 20일 6·25 이후 방위군으로 조직된 청년방위대를 국민방위군으로 대치시키기 위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법안의 주요 내용은 ①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들을 제2국민병에 편입시킨다, ②제2국민병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킨다, ③육군참모총장은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 감독한다 등이었다.


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돼 소집된 국민방위군 중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5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기막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조차 이 사건을 "9만 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아사·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할 것인가? 놀랍게도 이들은 걸어서 혹한의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다. 징집된 사람들은 군복을 줄 줄 알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으로 나왔는데, 아무것도 주질 않았으니 얼어 죽으라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다. 동사·아사·병사·낙오자들이 속출하는데도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이들을 가리켜 나온 '죽음의 행렬' 또는 '해골의 행렬' 이란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들 중 일부는 경상남도와 북도의 교육대에 수용되었고, 일부는 제주도로 옮겨졌지만, 수용되지 못한 장정들은 노상의 거지 신세가 돼 해골 모습을 해가면서 계속 죽어 나갔다.


이의를 제기하면 돌아오는 건 몰매뿐이었다. 신석상의 소설 『신의 바람』은 그 비참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정확하게 헤아리 수조차 없는 나날을 행군으로만 계속했던 국민방위군들이었다. 엄동설한에 낮에는 걷고, 밤에는 국민학교나 중학교의 강당이나 교실에서 잠을 재운 인솔자들은 청년들에게 주먹밥을 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 몇날 며칠을 그렇게 먹였고, 그렇게 잠을 재웠으니 견뎌낼 장사가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아온 수백 수천의 장정들은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되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어야 했다. ······ 이따위가 무슨 국민방위군이냐고 투덜대다가 인솔자에게 발각되면, 그냥 간첩으로 몰려 죽어도 속수무책이었다. ······ "몇백 리를 행군하다 보면, 동상에 걸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낙오되는 환자들 때리는 인솔자놈이었습니다. 시계나 금반지를 빼주면 슬그머니 눈을 감아줍니다. 그러니 성한 놈들인들 왜 그짓을 못하겠습니까. 돈을 받고도 많이 빼주었어요. 모집한 장병들을 강당이나 교실에서 자게 하고는, 제놈들은 술집으로 나가 술을 마셨어요. 장교나 사병들이 모두 한통속이었어요. 그러니 죽어나는 것은 우리들뿐이었지요." "불평불만을 터뜨렸다가 빨갱이로 몰려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구요."




리영희의 증언


당시 육군 통역 장교였던 리영희는 이 사건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예비병력으로서의 국민방위군의 최종 남하 목적지의 하나가 진주였다. 진주에 주둔한 날부터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국민방위군 청장년들의 행렬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되었는지 그 수는 지금 기억하지 못하지만 만 명은 훨씬 넘었다. 진주시내의 각종 학교 건물과 운동장은 해골같은 인간들로 꽉 들어찼다. 인간이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느닷없이 끌려 나온 그들의 옷은 누더기가 되고, 천릿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에 신발은 헤어져 맨발로 얼음길을 밟고 있었다. 혹시 몇 가지 몸에 지녔던 것이 있었더라도 굶주림 때문에 감자 한 알, 무우 한 개와 바꾸어 먹은 지 오래여서 몸에 지닌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리영희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실 안에서 수용된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교실이 작은 틈도 없이 채워진 뒤에 다다른 형제들은 엄동설한에 운동장에서 몸에 걸친 것 하나로 새워야 했다. 누운 해 일어나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죽으면 그대로 거적에 씌워지지도 않은 채 끌려 나갔다. 시체에 씌워줄 거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이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도,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초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