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24. 21:33

미군의 인종 차별주의


괴로운 이야기지만, 미군은 한국인의 목숨을 하찮게 보는 강한 인종 차별주의를 갖고 있었다. 단지 인종 차별주의 때문에 한국인을 함부로 죽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전쟁이건 군인들은 오직 전쟁 수행의 효율성만으로 전쟁을 치르진 않는다. 고려해야 할 다른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민간인들의 목숨일 것이다. 전쟁 수행에 상충되는 요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요소들의 무게나 가치를 비교적 낮게 평가하는 심리 상태에 인종 차별주의가 알게 모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건 결코 무리한 추정은 아닐 것이다.


미군 장성 로톤 콜린스는 한국전쟁은 "현대전보다는 우리의 인디언 개척 시절 전투와 더 유사한 구식 전투로의 회귀"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 말에 인종 차별주의의 혐의를 두는 건 부당한 일이겠지만, 전쟁의 대상이 어떤 인종인가에 따라 미군의 대응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의미는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해방정국의 역사에서 살펴보았듯이, 미군은 한국인들을 결코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 미군 중위가 말했듯이, "문화인들이라면 대체로 조선인들을, 동양인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우리가 여기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여기에 오랫동안 방치하지 않는다."


사실 미군이 한국인을 존중하거나 좋아한다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얼마 후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메튜 리지웨이는 회고록 『한국 전쟁』에서 "미군들이 한국전에서 기억하는 것은 오 천지에 깔린 똥냄새 뿐"이라고 썼다. 똥냄새만 미군을 괴롭힌 건 아니었을 것이다. 손철배에 따르면,


"우선 겉으로 드러난 한국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한국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는 생각을 아예 꺾어 버렸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서 경제적 풍요가 절정에 달했던 미국과 폐허가 된 한국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으므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들은 자부심이 강하고 점잖다는 설며에 미군 병사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본 한국인들은 모두 추한 꼴의 거지이거나 짐승들도 살기 어려운 움막에 살고 있는 농민뿐이다. 그들은 자부심과 예절은 고사하고 문명화되지도 못한 미개인에 불과하다'라고 반박하기 일쑤였다. 실제로 미군들만 보면 '헤이 싸전(sergeant), 기브 미 초콜릿, 기브 미 캔디' 하면서 달려드는 고아 같은 어린이들과 틈만 나면 뭔가를 훔쳐가는 한국인들을 자주 접하며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의 좀도둑질은 미국인들의 첫째가는 조롱이었다. 당시의 유명한 코디미언 밥 호프는 한국 아이가 비행기의 랜딩 기어를 훔쳐갔기 때문에 위문공연에 늦었다고 조크하여 청중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어니 미국인은 파카 만년필을 일부러 드러내놓고 돌아다니자 하룻동안 네 번이나 소매치기 당할 뻔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견해는 이후 한국전쟁이 진전되면서 미군들이 한국인들에 대해 갖게 된 생각까지 포함하고 있지만, 이미 3년간의 군정 경험을 갖고 있는 미군들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한국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미군은 한국인의 옷을 '흰 파자마'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흰 파자마'를 입은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였다. 영국의 전쟁 특파원 레지날드 톰슨은 『한국의 통곡』이라는 책에서 "미군 헌병들은 적들을 사람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원숭이처럼 취급한다"고 썼다. 톰슨은 "그렇지 않으면 이 천성적으로 친절하고 너그러운 미국인들이 그들을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죽이거나 그들의 집과 빈약한 재산을 박살낼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군의 인종 차별주의는 가끔 한국인들에게 기존 좌우 구분의 의미를 회의하게 만들기도 했다. 윤택림에 따르면,


"미군의 인종 차별주의가 한편으로는 지방 좌익뿐만 아니라 우익을 분노하게 했다. ······ 우익 청년들은 종종 한국 사람을 동물로 생각하고 좌익 색출시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대는 미군과 싸움이 붙었다고 한다. ······ 이러한 인종 차별적인 과잉 반응은 미군 병사와 한국 우익집단 간의 계속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44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


노근리 사건은 44년간 '잊혀진 사건'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으로 머물러야 했다. 1994년 6월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정부 요로에 진정서와 탄원서를 냈지만 모두 답이 없었다. 노근리 사건은 『조선인민보』 1950년 8월 19일자가 6단 크기로 상세히 보도한 이래로 1994년 4월 29일 연합통신에 의해 첫 보도가 이루어지고 『월간 말』 94년 7월호에 의해 상세히 다루어지기까지 44년간 언론매체에서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1999년 9월 미국 AP 통신이 보도해 세계적 이슈가 되고 나서야 한국에서도 노근리 사건이 큰 이슈가 되었다. 99년 10월 초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한국 대통령 김대중이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2001년 1월 12일 클린턴은 사과 성명을 냈다. 유족들은 미국보다는 한국 정부에 맺힌게 더 많다. "군사정권 때야 아무 소리도 못하지. 술김에 벙끗하기만 해도 바로 경찰서에 데려갔다."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한 미군 병사는 그때로부터 49년이 지나서도 "아직도 바람 부는 시절이 되면 어린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고백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23. 13:25

미군의 3박4일 인간 사냥


1950년 7월 26일 낮 충북 영동군 황간면 임계리와 주곡리 마을에 미군이 나타나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 미군은 제1기갑사단 제7기갑연대 제2대대 H중대(중화기 중대) 군인들이었다. 미군의 명령에 따라 500여 명의 피난민들이 4번 국도를 따라 인근 마을 노근리에 당도하였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경부선 열차의 철로로 올라섰다. 그 때 미군의 무전 연락을 받은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하였으며 지상의 군인들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철로 위에서만 최소 100여 명이 사망했다.


정구식의 중언이다.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 다시 정신을 차려 둘러보니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였고 여기저기서 사람과 소가 쓰러져 야비규환이었죠. 미군 폭격기는 약 20여 분간 폭격을 해댔어요. 나중에는 폭격기에서 기총소사도 했고요."


양해찬의 증언이다.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있다가 폭격을 당했어요. 어머니가 나를 맨 밑에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내 여동생을 얹고 당신 몸으로 우리를 감쌌어요. 폭격 후 일어서니 어머니는 하복부와 발목에 파편을 맞아 피투성이고 여동생은 한쪽 눈이 피범벅이 돼 있어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지만 여동생 눈알이 빠져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구요. 동생은 눈이 아파 견딜 수 없으니까, 안 보이니까 그것이 뭣인지도 모르고 그냥 떼내 버렸어요. 어머니와 동생을 껴안고 주변을 보니 우리 집에 피난와 있다 함께 온 고종사촌 아주머니가 만삭이었는데 즉사해 있더라구요. 할머니, 형님도 거기서 돌아가셨지요."


철로 위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사람들은 철로 밑의 굴다리에 숨었다. 그러나 굴다리에 은신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미군의 총질은 계속되었다.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총질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핏물을 그냥 떠마시면서 버텨야만 했다.


이게 바로 1950년 7월 26일부터 3박4일간 미군의 '인간 사냥'으로 300여 명이 죽어간 '노근리 사건' 이다.




피난민은 작전에 귀찮은 존재


왜 미군은 그런 '인간 사냥'을 했던 걸까? 먼저 이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T.R. 페렌바크의 『실록 한국전쟁』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1950년 7월 20일 아침, 대전 주변 방어선이 끊임없이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농부의 흰 옷으로 변장한 수백 명의 인민군은 시중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일단 시중에 들어서면 그들은 농민의 옷을 벗어 던지고 미군에게 총격을 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처에 저격병이 깔렸다. 미군 장교들은 본부요원과 보조부대 병력을 동원해 그들의 소탕을 시도해 보았지만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어느덧 긴 하루해도 저물었다. 딘 사단장은 시내에서 철수해야 할 때가 온 것을 알았다. 딘의 지프는 길 위에 멈춰 서서 불을 뿜는 트럭들 사이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렸다. 운전병은 전속력을 냈고, 한 구역을 다 간 곳에서 교차로 하나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단의 부관 클라크 중위가 고함을 질렀다. '지나왔다!' 간신히 대전을 빠져 나온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우군 진지에 닿으려는 노력을 35일이나 거듭하다 한국인들에게 의해 인민군에게 밀고되어 포로가 되었다. 7월 20일 야간에 대전을 철수, 영동을 지키던 미 제24단의 각 부대는 7월 22일 정오, 진지를 제1기갑사단에게 인계했다. 대전에서 100여 리 떨어진 영동 방어를 미 제24가단으로부터 인수받은 미 제1기갑사단은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런 배경에 주목하여 당시 미군들이 느꼈을 극도의 공포심을 인간 사냥의 이유로 지적하는 시각이 있다. 당시 미군들의 북한군에 대한 피해의식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데다 미군이 농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에 의해 습격을 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겁에 질려 이성을 잃은 나머지 저지른 짓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은용은 그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미군들은 노근리 앞 철로 위에다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피난민들의 짐 검색을 실시하고, 또 폭격 후에는 철로 밑 터널 속에 그들의 위생병을 보내 부상자들을 치료까지 해주면서 피난민들이 변장한 인민군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확인했었다. 무기라고는 한 점도 갖지 않았던 피난민들, 노인과 부녀자, 유아가 절반을 훨씬 넘었던 이들로 인해서 미군들이 겁을 먹을 이유도, 이성을 잃을 까닭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많은 생각끝에 도달한 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7월 26일 미 8군사령관이 주요 지휘관에게 보낸 메시지에 주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전선을 통과하려는 피난민들의 어떤 움직임도 허용하지 말라." 그 날 10시 미 제25사단 일지에는 "사단장 킨 장군이 전투 지역에 있는 민간인들을 '적대시하고 사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노근리 사건 이후에도 피난민에 대한 무조건 사격은 많이 일어났다. 제 1기갑사단 1950년 8월 29일자 일지에는 사단장이 "모든 피난민들을 향해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돼 있다.


왜 미군 지휘부는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피난민을 작전에 방해되는 귀찮은 존재로만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노근리 학살은 워낙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범죄라 이쪽에 무게가 실린다. 단지 귀찮다고 아무런 죄도없는 민간인을 죽일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노근리 사건을 넘어서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미군이 보인 행태와 직결되는 것이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21. 13:59

조병옥과 이시언의 고언(苦言)


이 사건은 『뉴욕타임스』 등 외국 언론의 보도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데다 이미 일어난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국회의 중간 보고가 1951년 4월 25일로 예정돼 있던 터라, 이승만은 4월 24일 국무회의를 소집하고선 자기 나름대론 비상한 대책을 발표하였다.


"정부 장관들은 서로 협력해서 일을 해야 하는 법이오. 거창 사건을 두고 내무·법무·국방 3부 장관들이 서로 협력하지 아니한 까닭에 대한민국의 체면이 손상당했소. 그러므로 3부 장관은 사임해야겠소."


평소 이승만을 '선생님'이라고 불러 온 조병옥은 "선생님, 저는 즉시 사임하겠습니다만, 국무위원들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사임하려는데 발언해도 좋겠습니까"라고 허락을 얻은 뒤 이렇게 말했다.


"정부 12부 중 11부 장관은 서로 협력해서 일을 잘하고 있습니다. 다만 신성모 국방부장관만이 협력을 않는 실정입니다. 이번 거창 사건도 순전히 있는 사실을 없다고 복명서를 꾸며 대통령께 보고하여 조사 시일을 끌었던 까닭에 국가의 위신이 손상되었으며 거창 사건을 발생케 한 장본인이 군인인 까닭에 그 책임은 오로지 신 국방부장관에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조병옥은 이 말을 하고 국무회의장을 나가 사표를 쓰고 떠났다. 장문의 사표였다.


"본인이 대통령의 명에 의거해 사표를 제출하는 바 각하를 보좌하던 국무위원 1인으로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충언을 올리고 내무부장관의 자리를 물러납니다. 첫째, 행정은 제도상으로 운영되어야 할 것이며 개인의 의욕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둘째, 정치는 재인(在人)이니 양심적이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십시오. 셋째,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로 탄생했으므로 반드시 민주국가로 성장 발전하여야 됩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일보라도 민주주의로부터 후퇴할 때에는 자유세계로부터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김준연도 즉시 사직서를 냈지만, 신성모는 미적거리며 자신의 구명 연판장을 돌리게 하였다. 3군총사령관을 비롯하여 각 일선 사단장급들이 신성모의 국방부장관 유임을 진정하였고, 신성모는 계속 군지휘관회의를 주재하엿다.


신성모는 김종원에게 국회 조사단의 현지 접근을 막으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김종원은 예하 장병을 공비로 가장시켜 국회 조사단에게 위협사격을 가해 내쫓는 짓까지 저질렀다. 이것이 정치 문제가 되고 5월 들어 진상이 밝혀졌지만, 이승만은 이들을 계속 비호하였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부에 몸담고 있는 자체를 수치스럽게 여길 일이었다. 5월 9일 부통령 이시영은 이승만의 파탄을 비판하는 동시에 자신의 무능과 자괴감 등을 담은 '국민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회에 사의를 표했다.


"탐관오리는 도처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앙을 실추케 하고 정부의 위신을 손상케 하며 신생 대한민국의 장래에 암영을 던져주고, 누가 참다운 애국자인지 흑백과 옥석을 가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이번에 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과거 3년동안 아무런 공헌이 없었음을 사과하는 동시에 일개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선비)로 돌아가 국민과 더불어 고락과 생사를 같이하려 한다. ······ 선량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국정감사를 더욱 철저히 하여 이도(吏道, 벼슬아치의 도리)에 어긋난 관료들을 적발·규탄하되, 모든 부정 사건에 적극적 조치를 취해 국민의 의혹을 석연히 풀어주기 바란다."


국회에선 재석 131명 중 115명이 사임에 반대해 사임서를 반려했지만 이시영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국회의 각파 대표들은 이승만을 방문해 이시영의 사임을 만류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승만은 "부통령이 현 정부를 만족하게 생각지 않아서 나가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말하느냐"며 거절했다.


5월 15일 국회는 제2대 부통령으로 김성수를 선출하였다. 김성수는 78표(51%)를 얻어 당선되었다.(사임을 원한 이시영에게도 73표가 나왔다)




이승만의 특정인 총애


이승만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여론이 악화되자 1951년 5월 5일에서야 신성모를 국방부장관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기붕을 장관에 임명하였지만, 아직 신성모에 대한 애정까지 접은 건 아니었다. 이승만은 6월 26일 국무회의에서 "신성모를 주일 한국대표로 임명하는데 찬성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주시오"라고 말했다. 이미 6월 23일에 신성모의 임명에 관해 일본에까지 통보해놓고 벌인 연극이었다. 김성수는 단호하게 반대하였으며, 어느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이승만을 결정을 재고하도록 요구하면서 오전 회의를 종료했다. 오후 회의에 김성수는 불참했고, 신성모의 주일 한국대표 임명 건은 4대 6으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결과를 무시하고 신성모를 임명했다. 김성수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아 앓아 눕게 된다.


거창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단의 보고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학살을 저지른 제3대대가 합동작전 때 받은 작전명령 부록에는 "작전 지역 내 인원들을 전원 총살하라. 공비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 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는 소각하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문제되자 11사단 본부는 원래의 작전명령을 회수하고 "작전 지역 내 주민들 가운데 이적 행위를 한 자들은 간이 군법회의에 의해서 처단하라"는 내용으로 변조된 작전명령을 내렸다.


8월 6일 군법회의 제5회 공판에서 증인으로 출두한 김종원은 "작전명령이 변조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며, 이는 국방부장관과 참모총장으로부터 이 사건이 확대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지시를 받고 자신이 주동이되어 꾸민 것이었다"고 밝혔다. 또 그는 합동조사단의 피습 사건도 "공비의 소행이 아니라 자신이 제9연대의 병력을 조사단의 길목에 배치시켜 따발총으로 위협사격하게 하여 조사를 호위하던 무장 경관이 부상을 당한 것처럼 꾸몄다"고 진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모는 이승만의 총애에 의해 면책되었다. 군법회의는 연대장 오익경에게 무기징역, 대대장 한동석에게 징역 10년, 김종원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이들은 사면을 받고 복권되었다.


거창 사건을 일으킨 제3대대에 한 통역 장교가 있었다. 그가 바로 리영희였다. 그는 사건 발생 훨씬 후에야 이 사건을 알게 되었고, 축소된 학살 규모의 진상은 수십 년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그는 훗날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쟁터에서 지휘관과 (미국) 고문관을 따라다니기만 하는 것으로 소임을 삼았거나, 안전한 후방만을 골라서 근무하는데 재주를 부렸다면 거창 사건 희생자 719명과 그 유족들에게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죄책감으로 느낄 필요가 없다. '나는 모르는 일, 내 소임 밖의 일'이라는 한마디로 이 사건을 오래전에 잊어버렸을 것이다. 어째서 이 나라는 인간 말살의 범죄가 '공비'나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이처럼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 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이데올로기의 광신 사상과 휴머니즘에 대한 멸시를 깨쳐야겠다는 강렬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낀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의 '잔인성'을 나무라는 데 동조하지 않게 되었다. 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장 한동석 소령, 그리고 제11사단장 최덕신 소장은, 거창 사건 후, 우리 사단이 지리산 작전을 제8사단에 인계하고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도중 군법회의가 회부되어 부대를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1년도 복역하지 않고 석방되었다. 광신적 반공주의, 전쟁과 군대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때부터 더욱 달라져 갔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9. 21:04

719명의 민간인 학살


전남 함평에서 민간인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천 454동을 불태웠던 11사단 예하 부대의 이른바 '견벽청야' 학살극은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또다시 발생했다. 11사단 9연대 제3대대는 719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죽은 사람 가운데 14세 이하가 전체 사망자의 전반인 359명이었으며, 60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사망자의 10%, 그리고 나머지 40%의 사망자 중에서도 3분의 2는 부녀자들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을까? 이런 일련의 학살극은 국가의 존재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톱질전쟁'이라고 하는 전쟁의 구조상 전선이 따로 없는 가운데 빨치산 출몰 지역은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 지배하에 놓이기 마련이었다. 그런 지역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낮에는 국군에 협조하고 밤에는 빨치산에 협조하는 '이중 생활'을 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 토벌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빨치산에 협조하는 자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11사단 9연대(연대장 오익경)는 51년 2월초, 거창을 포함해 함양·산청 등 지리산 남부 지역에서 공비 소탕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이에 따라 거창의 제3대대를 중심으로 경찰과 청년의용대 등이 2월 7일 신원면에 진주하게 되었다.


빨치산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산으로 퇴각하자, 제3대대는 경찰과 청년의용대 병력을 남기고 작전 계획에 따라 신창 방면으로 이동했다. 군대가 신원면을 떠나자 빨치산은 그 날 밤 습격을 해 경찰과 교전하게 되었고, 경찰과 청년의용대 병력만으로는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 제3대대는 다시 신원면으로 진주하였다.


제3대대장 소령 한동석은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 1천여 명을 신원국민학교로 소집했다. 성인 남자들은 이미 피신을 한 뒤였기 때문에 모인 주민 대부분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한동석은 지서 주임, 사찰계 형사, 신원 면장 등으로 하여금 군인, 경찰, 공무원 및 지방유지 가족을 골라내게 한 뒤 남은 사람들을 박산 골짜기로 끌고 가서 기관총으로 집단학살한 후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시체더미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기도 했다 2월 10일에서 13일 사이에 저질러진 일이었다.


살해 대상자 선별 기준은 오직 한가지였다. 군인, 경찰, 공무원 및 지방유지 가족이냐 아니냐 하는 것. 그 선별의 악역을 맡은 사람 중의 하나인 <박영보 면장>을 제목으로 고은은 이런 시를 지었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이름/청야작전!/신원초등학교 교실마다 잡혀온 6백명/한 장교가/이중에 군경가족 있느냐고 물었다/몇 가족이 나왔다/사실이었다/또 몇 사람이 나왔다/사실이 아니었다/살기 위해/군경가족이라고 말했다/그때 면장 박영보가 나섰다/유들유들한 얼굴/큰 점 하나 늘어붙은 얼굴/그가/한 사람을 끌어냈다/네가 무슨 군경가족이가/또 한 사람을 끌어냈다/네가 무슨 군경가족이란 말이가/6백명 면민들 묶여갔다/비탈진 산자락/후미진 산골짝 거기 총소리 퍼부었다/그러다가/조용해졌다/······"




신성모의 사건 은폐 지시


제3대대는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시체를 휘발유로 불태우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을 뿐만 아니라 학살 지역을 외부와의 왕래로부터 일체 차단했다. 생존 주민들에게는 학살에 대해 발설할 경우 공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학살시 밖에 나갔다가 뒤늦게 돌아온 가족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고은의 <거창 이복남>이다.


"1951년 1월 이철수는 열네살이었습니다/할머니 유분녀/아버지 이종묵/어머니 백씨/동생 철호/머슴 박서방/식모 쌍가마 참례/이렇게 여섯이 빨갱이라는 죄로 학살당했습니다/그런데/외갓집 갔던 철수와 누이동생 복남이는 살아 남았습니다/국군은/열살짜리 복남이를 끌고 가서/손바닥에 못 박아/빨갱이라고 말하라고 협박했습니다/빨갱이 아니어요/빨갱이 아니어요/하고/마구 울부짖었습니다/그러다가/빨갱이입니다/하고 말해 버렸습니다/기절했습니다/세상은 얼어붙었습니다/하늘/푸르게/푸르게 얼어붙었습니다/오빠 철수는/세상이 무서워/국군이 무서워/산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어이할 수 없이/빨치산 소년이 되었습니다"


제3대대는 719명을 죽인 전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은폐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대대장 한동석은 학살자의 숫자를 187명으로 줄여 공비 및 통비분자들을 소탕했다고 연대에 보고했다. 그러나 한두 명도 아니고 허공으로 사라진 532명을 어떻게 은폐할 수 있었겠는가.


이 사건은 2월 말경 피난 수도인 부산까지 소문으로 퍼졌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사건 한 달 후인 3월 12일 제11사단 자체가 육군과 국방부에 진상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보고서는 "학살 주민의 대부분이 양민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이 밖에도 부녀자 강간·물품 강요·재산 약탈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미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국방부장관 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 같은 군의 비행이 외국에 알려진다면 전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군의 사기를 해친다"고 하며 사건을 은폐할 것을 지시했다. 또 그는 헌병사령관 겸 경상남도 지구 계엄사 부장이었던 김종원 대령 등을 대동하고 3월 중순경 사건 현장을 답사한 후 "보고된 희생자들 187명은 모두 통비분자 들이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 법무부, 내무부의 조사 결과는 제각각이었다. 학살자 수에 대해 국방부는 225명, 법무부는 275명, 내무부는 350명이라고 보고했다. 범무부장관은 김준연, 내무부장관은 조병옥이었다. 민국당 출신 조병옥과 김중연은 전쟁 발발과 동시에 거국내각의 명분으로 입각했었다.


당시 민국당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고 있었던 바, 이승만은 조병옥과 김준연이 진상 조사에 적극적이며 이 사건을 계속 거론하는 이유가 신성모는 물론 자신까지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7. 16:00

규명되지 않은 정치자금 조성 의혹


1951년 7월 5일 방위군 사령부가 있던 대구 동인국민학교 강당에서 열린 육군고등군법회의장에는 물론 교정에까지 방청객이 꽉 차 고성능 마이크까지 가설했다. 검찰관인 중령 김태청은 추상과 같은 논고를 폈다.


"휘하 장병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 순간에도 그들은 따뜻한 요정에서 기생을 옆에 끼고 양주 가효(맛 좋은 안주)로써 유흥삼매하였던 것이니, 이로 인해 이름 모를 언덕에 원혼이 된 애국 장정의 수는 또한 얼마나 되겠습니까? ······ 피고인에게 묻노니 그대들 귀에는 이 삼천만 민족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 공개 법정에는 전 육군참모총장인 소장 정일권도 증인으로 출정하였다. 김태청은 정일권을 향해 무슨 이유로 일등병 경험조차 없는 김윤근이 준장과 사령관이 되었는가를 비롯해 다섯 항목의 질문을 던졌다. 정일권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두가 이승만의 명령이었다고 대답했다. 전시 특명검열관인 준장 김석원은 정일권의 답변을 '책임회피'로 판정하고, 퇴장하는 정일권에게 다가서서 "이봐, 지금의 답변이 그게 뭔가. 당장 견장을 떼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석원은 달려온 장교에게 제지되었고, 정일권은 말없이 사라졌다.


1951년 7월 19일 김윤근·윤익헌·강석한·박창원·박기환 등 5명은 사형을 당했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김윤근을 외국으로 빼돌릴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대구 교외의 야산에서 이루어진 총살형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처형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은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처형 집행 후 국민방위군 간부들에 의해 부정 처분된 예산이 이승만 정부와 정부 고위층에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어 정치 쟁점화 되었다. 국회의원 김종회는 국민방위군용 군수물자를 부산으로 유출, 3억여 원을 횡령하여 이를 이승만의 비서에게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는 폭로를 하였고, 국민방위군 예산이 국회 내 이승만 지지 세력 및 정부 고위층, 군부 내의 간부 등에 정치자금으로 유출되거나 뇌물로 상납되었다는 주장들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들이 너무 일찍 처형됨으로써 많은 의문을 남긴 채 종결되고 말았다. 한홍구에 따르면,


"당시의 관찰자들은 국민방위군 사건은 단지 정부의 준비 부족이나 방위군 지휘부의 예산 횡령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성모가 이승만 이후를 노려 자기의 정치적 지지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대한청년단 출신들이 많이 포진한 신정동지회라는 단체를 후원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예산을 빼달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군 병사는 죽을 때 '빽'하고 죽는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승만 정권에서 저질러진 총체적 부패구조의 완결판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 부패구조는 단지 불법적으로는 돈을 먹는다든가 하는 차원을 떠나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분노라는 것도 웬만한 수준이 되어야 터뜨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김동춘은 국민방위군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국가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전쟁 상황에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도 장정으로 끌려간 것이 몹시 주변머리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야릇한 부끄러움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 부재'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인민군과 국군 가운데 어느 쪽으로 징집되더라도 그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저 도망가서 일신의 생을 도모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공권력의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지탱하는 일에 대해 누구도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된다. 국민들은 지금도 돈 있고 배운 사람들은 다 외국으로 도망가고, 못 배우고 없는 사람들만 나가 싸우다 죽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죽으면서도 '빽' 하고 죽었다고 한다.


왜 '빽' 하고 죽었을까? 홍성원의 해설을 더 들어보자.


"한국 병사는 전방에서 전투 중에 전사할 때 '어머니'를 부르는 대신 '빽' 하고 죽는다고 한다. 그는 백이 없어서 안전한 후방으로 못 빠지고 최전방 고지에서 적탄을 맞아 죽게 되었다. 자기의 죽음이 백 때문임을 알고 그는 백에 원한이 사무쳐서 최후의 순간에도 '빽' 하고 죽는다는 이야기다."


서중석은 임시 수도 부산에서 주전론은 애국이요, 반전론은 매국으로 규정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전론자들은 전장에는 남의 자식들이 나가서 싸워 이겨주고, 나는 돈이나 벌어보자는 식이었다.


"권력을 쥔 자, 가진 자들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고, 보낸다 하더라도 안전한 후방에 배치되도록 '빽'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대학은 징집 면제를 받으려는 학생들의 은신처로 되어 ······ 군대는 주로 못살고 힘없는 농민의 자식들이 갔다."


백마부대장 김운기의 회고다.


"각종 전투를 하면서 부를 누리고 권세 있는 집안의 자식이 군에 들어왔다는 말은 과문한 탓인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리영희도 일선에서 그런 부패상을 원 없이 목격했다. 가지고 배운 집자식들은 일선에서 후방으로 빠지고 목숨 걸고 싸우러 가는 군인들은 죄다 가난하고 못 배운 집 자식들이었다.


"학교깨나 다닌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가고, 이 틀림없는 죽음의 계곡에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 나라의 불쌍한 자식들만이 보내지는가? 나라 사랑은 힘없는 자들만이 하는 것인가? 전쟁과 군대를 알게 될수록 나는 점점 더 사색적으로 되어 갔다. 그럴수록 이 나라의 기본부터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6. 15:47

김윤근·신성모·이승만의 적반하장


이 '해골의 행렬'을 목격한 야당 의원들에 의해 국회에서 1951년 1월 15일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은 1월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백만 국민병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음은 실로 유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제2국민병의 참상에 대한 비난을 불순분자의 선동이라고 몰아붙였다. 국회에 출석한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제5열의 책동에 동요하지 말기 바란다"고 훈시하였다.


국회는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성모는 "국방부장관의 책임하에 있는 본 사건의 책임자 김윤근을 국회에서 조사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 최종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기 때문에 신성모가 방패막이를 자임하고 나섰을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민방위군 부대의 운영을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청년방위대에 맡겼기 때문에 저질러진 것이었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은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 등 청년단 간부들도 대령,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김종오에 따르면, "원래 김윤근은 씨름꾼 출신으로 일제 때 일본군 사병으로 복무했는데 해방이 되자 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6·25를 전후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되었다. 김윤근이 저지른 방위군 사건을 문제삼아 국회가 신성모 장관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 대통령은 '강을 건너다 말을 바꾸어 탈 수 없어!'라고 일축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신성모는 수사를 방해하다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사위인 김윤근은 빼돌리고 부사령관 윤익헌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래서 군사법정을 구성하면서 자신의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을 재판장에 임명하였다. 이선근은 신성모의 뜻을 받들어 재판 개시 3일만에 서둘러 김윤근에게 무죄,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도 하는 수 없이 타협책을 강구했다. 국회진상 조사단의 중간 보고가 4월 25일로 국방부장관 신성모, 내무부장관 조병옥, 법무부장관 김준연을 사임시키는 내각 개편과 동시에 국회에서의 방위군 사건 중간 보고 발표의 중지를 요청하면서 사건의 확산을 무마하려고 했다. 3부 장관 사임은 2월에 일어난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이승만으로선 동시에 터진 두 가지 큰 사건으로 수세에 몰리자 어떻게해서든 국면 전환을 꾀하고자 했을 것이다.




방위군 고위층의 거대한 예산 착복


그러나 진상조사 위원이었던 의원 서민호는 예정대로 중간 보고를 강행했다. 그는 보고를 통해 "그 동안 말하면 죽인다는 협박을 수없이 받으나 전혀 불순한 동기가 없음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한다"고 전제하면서, 방위군 간부들 대부분이 정치에 개입했으며, 상부의 명령임을 빙자하여 예산을 함부로 착복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이 보고에 따르면, 1950년 12월 17일부터 3월 30일까지 105일 동안 연 병력 7천58만2천940명의 유령 병력을 조작해서 모두 23억5천100여 만 원의 현금이 부정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방위군 사령부에서 제시한 통계를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식료품비의 조달 액수와 실제로 집행된 액수의 차이가 무려 20억 원에 달함으로써 결국 3개월 동안 55억원을 방위군 고위층들이 착복했다. 부사령관에 대한 기밀비용이 105일 동안에 무려 3억1천755만 원이나 지출되었고, 국회 내의 관련된 정파에 1억 원이나 흘러간 것 등 거대하고 복잡한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규명하려면 앞으로 최소한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보고 5일만인 4월 30일 '국민방위군 설치법 및 비상시 향토방위령의 폐지에 관한 법률안'이 상정되어 통과되었다. '해골의 행렬'을 시켜놓곤 이제 귀향하라는 것이었다. 신석상의 『신의 바람』에 따르면,


"그런데 이번에는 목적지 진주에 당도하자마자 해산을 시키면서 귀향하라니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어디 또 있겠는가. ······ '아냐, 나는 국민방위군의 책임자들을 다 고발할 거다. 군인을 모집해 놓고 거지를 만들어 귀향시킨 그놈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이냐. 또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매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으냔 말야.'"


최종 책임자는 이승만이었으나 이승만에 대한 고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윤근과 그 일행이 죽어줘야 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데다 그런 효과를 위해 재판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국방부장관이 5월5일 신성모에서 이기붕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기붕은 장관에 임명되고 나서 이 사건의 재심을 명했던 것이다. 이기붕은 이 일로 '인기가 급상승'하여 '이승만의 후계자로 부상'하게 되지만, 훗날 역사는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는 걸 보여주게 된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5. 23:18

천인공노할 사건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정부는 1950년 11월 20일 6·25 이후 방위군으로 조직된 청년방위대를 국민방위군으로 대치시키기 위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는데, 법안의 주요 내용은 ①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들을 제2국민병에 편입시킨다, ②제2국민병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시킨다, ③육군참모총장은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 감독한다 등이었다.


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돼 소집된 국민방위군 중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만 50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기막힌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조차 이 사건을 "9만 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아사·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할 것인가? 놀랍게도 이들은 걸어서 혹한의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다. 징집된 사람들은 군복을 줄 줄 알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으로 나왔는데, 아무것도 주질 않았으니 얼어 죽으라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다. 동사·아사·병사·낙오자들이 속출하는데도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다. 이들을 가리켜 나온 '죽음의 행렬' 또는 '해골의 행렬' 이란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이들 중 일부는 경상남도와 북도의 교육대에 수용되었고, 일부는 제주도로 옮겨졌지만, 수용되지 못한 장정들은 노상의 거지 신세가 돼 해골 모습을 해가면서 계속 죽어 나갔다.


이의를 제기하면 돌아오는 건 몰매뿐이었다. 신석상의 소설 『신의 바람』은 그 비참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정확하게 헤아리 수조차 없는 나날을 행군으로만 계속했던 국민방위군들이었다. 엄동설한에 낮에는 걷고, 밤에는 국민학교나 중학교의 강당이나 교실에서 잠을 재운 인솔자들은 청년들에게 주먹밥을 주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 몇날 며칠을 그렇게 먹였고, 그렇게 잠을 재웠으니 견뎌낼 장사가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아온 수백 수천의 장정들은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되어 허기진 배를 움켜쥐어야 했다. ······ 이따위가 무슨 국민방위군이냐고 투덜대다가 인솔자에게 발각되면, 그냥 간첩으로 몰려 죽어도 속수무책이었다. ······ "몇백 리를 행군하다 보면, 동상에 걸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낙오되는 환자들 때리는 인솔자놈이었습니다. 시계나 금반지를 빼주면 슬그머니 눈을 감아줍니다. 그러니 성한 놈들인들 왜 그짓을 못하겠습니까. 돈을 받고도 많이 빼주었어요. 모집한 장병들을 강당이나 교실에서 자게 하고는, 제놈들은 술집으로 나가 술을 마셨어요. 장교나 사병들이 모두 한통속이었어요. 그러니 죽어나는 것은 우리들뿐이었지요." "불평불만을 터뜨렸다가 빨갱이로 몰려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구요."




리영희의 증언


당시 육군 통역 장교였던 리영희는 이 사건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끌려온 예비병력으로서의 국민방위군의 최종 남하 목적지의 하나가 진주였다. 진주에 주둔한 날부터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국민방위군 청장년들의 행렬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되었는지 그 수는 지금 기억하지 못하지만 만 명은 훨씬 넘었다. 진주시내의 각종 학교 건물과 운동장은 해골같은 인간들로 꽉 들어찼다. 인간이 그런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느닷없이 끌려 나온 그들의 옷은 누더기가 되고, 천릿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에 신발은 헤어져 맨발로 얼음길을 밟고 있었다. 혹시 몇 가지 몸에 지녔던 것이 있었더라도 굶주림 때문에 감자 한 알, 무우 한 개와 바꾸어 먹은 지 오래여서 몸에 지닌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리영희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실 안에서 수용된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교실이 작은 틈도 없이 채워진 뒤에 다다른 형제들은 엄동설한에 운동장에서 몸에 걸친 것 하나로 새워야 했다. 누운 해 일어나지 않으면 죽은 것이고, 죽으면 그대로 거적에 씌워지지도 않은 채 끌려 나갔다. 시체에 씌워줄 거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이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도,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초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