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16. 15:47

김윤근·신성모·이승만의 적반하장


이 '해골의 행렬'을 목격한 야당 의원들에 의해 국회에서 1951년 1월 15일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은 1월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백만 국민병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음은 실로 유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제2국민병의 참상에 대한 비난을 불순분자의 선동이라고 몰아붙였다. 국회에 출석한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제5열의 책동에 동요하지 말기 바란다"고 훈시하였다.


국회는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성모는 "국방부장관의 책임하에 있는 본 사건의 책임자 김윤근을 국회에서 조사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 최종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기 때문에 신성모가 방패막이를 자임하고 나섰을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민방위군 부대의 운영을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청년방위대에 맡겼기 때문에 저질러진 것이었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은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 등 청년단 간부들도 대령,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김종오에 따르면, "원래 김윤근은 씨름꾼 출신으로 일제 때 일본군 사병으로 복무했는데 해방이 되자 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6·25를 전후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되었다. 김윤근이 저지른 방위군 사건을 문제삼아 국회가 신성모 장관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 대통령은 '강을 건너다 말을 바꾸어 탈 수 없어!'라고 일축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신성모는 수사를 방해하다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사위인 김윤근은 빼돌리고 부사령관 윤익헌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래서 군사법정을 구성하면서 자신의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을 재판장에 임명하였다. 이선근은 신성모의 뜻을 받들어 재판 개시 3일만에 서둘러 김윤근에게 무죄,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도 하는 수 없이 타협책을 강구했다. 국회진상 조사단의 중간 보고가 4월 25일로 국방부장관 신성모, 내무부장관 조병옥, 법무부장관 김준연을 사임시키는 내각 개편과 동시에 국회에서의 방위군 사건 중간 보고 발표의 중지를 요청하면서 사건의 확산을 무마하려고 했다. 3부 장관 사임은 2월에 일어난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이승만으로선 동시에 터진 두 가지 큰 사건으로 수세에 몰리자 어떻게해서든 국면 전환을 꾀하고자 했을 것이다.




방위군 고위층의 거대한 예산 착복


그러나 진상조사 위원이었던 의원 서민호는 예정대로 중간 보고를 강행했다. 그는 보고를 통해 "그 동안 말하면 죽인다는 협박을 수없이 받으나 전혀 불순한 동기가 없음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한다"고 전제하면서, 방위군 간부들 대부분이 정치에 개입했으며, 상부의 명령임을 빙자하여 예산을 함부로 착복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이 보고에 따르면, 1950년 12월 17일부터 3월 30일까지 105일 동안 연 병력 7천58만2천940명의 유령 병력을 조작해서 모두 23억5천100여 만 원의 현금이 부정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방위군 사령부에서 제시한 통계를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식료품비의 조달 액수와 실제로 집행된 액수의 차이가 무려 20억 원에 달함으로써 결국 3개월 동안 55억원을 방위군 고위층들이 착복했다. 부사령관에 대한 기밀비용이 105일 동안에 무려 3억1천755만 원이나 지출되었고, 국회 내의 관련된 정파에 1억 원이나 흘러간 것 등 거대하고 복잡한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규명하려면 앞으로 최소한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보고 5일만인 4월 30일 '국민방위군 설치법 및 비상시 향토방위령의 폐지에 관한 법률안'이 상정되어 통과되었다. '해골의 행렬'을 시켜놓곤 이제 귀향하라는 것이었다. 신석상의 『신의 바람』에 따르면,


"그런데 이번에는 목적지 진주에 당도하자마자 해산을 시키면서 귀향하라니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어디 또 있겠는가. ······ '아냐, 나는 국민방위군의 책임자들을 다 고발할 거다. 군인을 모집해 놓고 거지를 만들어 귀향시킨 그놈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이냐. 또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매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으냔 말야.'"


최종 책임자는 이승만이었으나 이승만에 대한 고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윤근과 그 일행이 죽어줘야 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데다 그런 효과를 위해 재판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국방부장관이 5월5일 신성모에서 이기붕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기붕은 장관에 임명되고 나서 이 사건의 재심을 명했던 것이다. 이기붕은 이 일로 '인기가 급상승'하여 '이승만의 후계자로 부상'하게 되지만, 훗날 역사는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는 걸 보여주게 된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