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9. 13. 17:57
12.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는다"

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주 4.3 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지시했다. 이승만을 총재로 모시고 있는 대한청년단은 이승만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김계순은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 온 한 처녀가 하귀 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대가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결국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라고 증언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한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들 한 번씩 찌르라고 했습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경찰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에게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 먹고 난리가 났어요. 또한 그 일로 몹시 앓았습니다. 사촌언니는 그때 찔렀다면서 그 후 막 아파서 죽다 살아났다는 겁니다.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들 나처럼 앓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앓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 안 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몸을 줬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7~208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