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9. 19. 17:42
13. 4.3의 배후엔 미국이 있었다.

48년 5.10선거에서 꼭 1년이 지난 49년 5월 10일 제주도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49년 5.10재선거를 치르고 돌아온 경찰대에게 국무총리 이범석은 환영사에서 "제주도의 완전 진압은 비단 대한민국에 대한 큰 충성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공산주의 독재로부터 방어하는 데 큰 공적이 있는 것"이라고 치하했다.

『조선중앙일보』 49년 9월 1일자는 "외국 기자들은 이 사태를 가리켜 가장 흥미롭기나 한 듯이 '마셜'과 '몰로토프'의 시험장이니, 미소 각축장이니, 38선의 축쇄판이니 하고 이곳 제주도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을 붓끝으로만 이리 왈 저리 왈 한 사실도 있었다"면서, 제주도는 "극동의 반공보루로써 새로운 시험장이 되어져 있는 것"이라고 썼다.

미국은 제주에서의 '인간 사냥'에 어느 정도 개입했던 것일까? 훗날 4.3 진압을 미군 장교가 직접 지휘했다는 미국 측 인사들의 증언도 나왔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진상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국이 '인간 사냥'을 방조 내지 부추켰다는 점이다. 미국은 왜 그랬을까?

그 이유에 대해 박명림은 '상황론'과 '음모론'을 제시했다. 상황론은 "철수에 앞서 친미반공 기지를 구축한다는 미군의 점령 목표가 여순사건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고, 제주도 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전율할 학살극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음로론은 "미군은 대공투쟁의 전초 기지로써 제주도에서 '고도로 의도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제주도의 군사적 기지로써의 가치에도 주목했으리라는 시각도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말기는 45년에 약 7만명의 병력을 제주도내에 주둔시켰다는 것, 46년 10월 AP통신이 제주도를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지브롤터에 비유했던 것, 47년 이승만의 제주도 미군기지 제공방언, 49년 대만 총통 장개석의 공군기지 설치 제안, 49년 10월 주한 미대사관 보고서에서 "전략상 엄청난 가치를 지닌 제주도"라고 거론한 점이 바로 제주도의 그런 군사전략적인 가치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미군의 제주항쟁에 대해 초토작전을 강핸한 건 본국 정부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은 당시 유엔에서 겪고 있던 곤경, 즉 한반도 문제 해결을 둘러싼 소련의 비난을 의식했다. 소련은 "미군정의 폭정에 대항해 주민들이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 좋은 예가 제주도 폭동사건"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관계자를 문책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폭도를 진압하라는 명령까지 하달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유엔의 한국정부 승인을 앞두고 정통성 문제로 번질까 봐 초강경 대응을 원했으니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8~210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