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9. 19. 18:02
14. 날조된 딱지와의 투쟁, 기억의 타살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뜻이 어떠했건, 그들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축하는 그 순간에도 제주 도민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제주도민들은 이승만 정권이 덧씌운 '빨갱이 섬' 이라는 날조된 딱지와의 투쟁을 전개해야 했다.

한수영이 지적했듯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 출신 청년들이 해병대에 무더기로 자원입대해 '귀신잡는 해병' 이라는 별명을 낳게 만든 것도 '빨갱이 섬' 혹은 '잠재적인 좌익분자들의 소굴' 이라는 바깥의 인상을 어떤 방법으로든 허물고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싶었던 제주 사람들의 생존의지 때문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학살극이 완료된 이후에도 제주도민들의 고통과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현기영은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했다.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30년 동안 단 한번도 고발되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 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 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 해서 30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 봐 두려웠다."

또 현기영은 "역대 독재정권들은 공포정치를 통하여 4.3을 금기의 영역에 묶어놓고, 그 사건에 대한 도민의 집단적 기억을 폭력적으로 말살하려고 했었다"며, "비참한 사건에 대한 도민의 집단적 기억을 말살하는 정치를 '망각의 정치'라고 한다"고 했다.

"이러한 기억의 타살행위는 반세기 동안 도민의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도민들은 그 참혹한 경험을 망각하지 않고는 도무지 살 수 없어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기억을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간의 내통이 철저히 봉쇄되고 말았으니, 살아남은 자 역시 살아 있되 기억이 타살당한 죽은 자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제민일보』 기자 김종민이 1988년 봄 생존자의 증언 채록에 나섰을때의 경험담이다.

"일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취재반을 문 앞에서 쫓아냈다. 어쩌다 할아버지가 증언을 할라치면 어느새 부엌에서 나온 할머니가 막았다. '이 하르방 또 잡혀 가려고 실없는 소리를 한다' 고. ...... 반발심도 '적당하게' 당해야 생기는 걸까. 체험자들은 철저하게 좌절해 패배주의에 빠져있었고 큰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모가 죽을 때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러야 했던 유족들은 진상규명 의지는커녕 '4.3'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꺼렸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10~212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