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9. 3. 13:24
10. 사살연습이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

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도 끔찍했다. 제2연대 3대대 중대 일부 병력이 북촌리를 통과하다가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30~300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300여채의 가옥을 잿더미로 만든 사건이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1쳔여 명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교단에 오른 현장 지휘자는 먼저 민보단 책임자를 나오도록 해서 '마을 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즉결처분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위협사격으로 30대 임산부와 두 살짜리 젖먹이를 안은 40대 여인들이 쓰러졌다. 많은 마을 주민들은 젖먹이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숨진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들어 젖을 빨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전한다. 군인들은 다시 군경 가족을 나오도록 해서 운동장 서쪽 편으로 따로 분리시켰다.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주민들 가운데는 군경 가족이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이 '사는 길'이라 여겨 필사적으로 달려나가다 개머리판으로 얻어터지거나 총상을 입기도 했다. 어린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던 군인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주민 몇십 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밭에서 사살하기 시작했다."

당시 2연대 3대대의 대대장 차량을 운전했던 김병석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대대장 차량은 임시로 앰뷸런스를 사용하고 있었어. 날씨가 추워서 나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고 6, 7명의 장교들이 앰뷸런스 뒤에서 참모회의를 가졌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했어. '학교 담 위에 대대 병력을 모아놓고 기총사살을 해야 한다', '대대 화기인 박격포를 이용해야 한다' 등 의견이 분분했지. 그때 한 장교가 '군대 들어와서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는 군인이 태반이다. 분대별로 길 건너 옴팡밭(길 아래쪽에 푹 꺼진 밭)으로 끌고 가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어. 모두 좋다고 했지. 동쪽 줄부터 끌고 가기 시작했어. 그때는 나도 혼이 다 나갔던 것 같애. 고향이 함덕리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는 인척관계도 있을 거고 동창들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아무 생각도 안났어."

60년 4.19 후 『조선일보』 60년 12월 22일자가 이 사건을 기사화했다. 이 기사는 <끔찍한 악몽, 과부(寡婦)의 마을...... 해마다 이맘 땐 집단제사> 라는 제목 아래 "남녀 유권자 비율을 따져보면 거의 3대 1에 가까울 만큼 남자들이 희소한 곳"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5.16쿠데타로 진상은 다시 파묻히고 말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4~205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