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8. 26. 12:14
8. 토벌대의 집단 광기

초토화 작전 기간 중에서도 48년 12월 중순부터 약 열흘간 집단학살이 가장 극심했다. 김종민은 "이 시기 토벌대의 행태는 마치 총살시킬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광분한 듯 보인다"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와 관련, 한 미군 보고서는 9연대의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를 '수준 높은 작전을 펼치려는 욕망과 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 기록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 이라고 분석했다(『G-2 보고서』, 1948. 12. 17). 당시 제주 주둔 9연대는 12월 말로 2연대와 교체하기로 되어 있었다.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여순사건 진압을 완수했던 2연대의 성과에 맞서기 위해 '전과' 올리기에 열을 냈다는 분석이다."

12월 말 제주 주둔 토벌대가 9연대(연대장 송요찬)에서 2연대(연대장 함병선)로 교체되면서 서청도 더욱 기승을 부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 광기'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완전한 언론통제 때문이었다.

열세 살 소년을 고문해서 죽게 만든 사건의 48년 9월 15일자 중앙 신문들에 보도된 이후 언론마저 토벌대의 토벌 대상이 되었다. 48년 10월 『경향신문』 제주지사장 현인하와 『서울신문』 제주지사장 이상희가 끌려가 처형당했으며,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정과 전무가 끌려갔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는데, 누가 감히 목숨 걸고 제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밖에 상세히 알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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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4.3사건지원사업소가 발굴한 4.3사건 당시 희생자 유해 3구



사실 '집단 광기'의 조짐은 사태 초기부터 있었다. 김종민에 따르면, "처음엔 '말 태우기'와 '뺨 때리기'가 유행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돌게 했다. 또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머뭇거리거나 살살 때리면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심지어는 총살에 앞서 총살자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 부모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표선면 가시리 안공림 씨(58)는 여덟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던 끔찍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도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 했다'고 했다...... 미친 짓거리는 점점 심해져 갔다. 연행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한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뺨 때리게 하기'는 오라리 방화사건 때 벌어진 일이었는데, 고은은 <오라리>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 담배꽁초를 던졌다 / 침 뱉었다 / 오라리 마을 /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 할아버지 때귀 갈겨봐 / 손자는 불응했다 /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 세게 때려 이 새끼야/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 세게 찼다 / 영감 손자 때려봐 /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 세게 쳐 / 세게 쳤다 /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 울면서 / 서로 따귀를 쳤다 / 빨갱이 할아버지가 / 빨갱이 손자를 치고 /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 이게 바로 빨갱이 놀이다 봐라 / 그 뒤 총소리가 났다 / 할아버지 임차순과 / 손자 임경표 / 더 이상 /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 총소리 뒤 /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0~202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