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7. 31. 22:57
4. '손가락총'과 김종원의 참수형

반란군에 가담했던 사람의 선별 작업은 마구잡이식이었다. 예컨대, 당시 가담자들이 신발공장에서 '찌까다비'(일할 때 신는 신발)를 가져다 신었다는 소문 하나만 듣고 진압군은 그 신발을 신은 청년은 무조건 사살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청년들이 학생복을 입은 죄로, 머리를 군대식으로 짧게 깎은 죄로, 국방색 런닝셔츠를 입은 죄로 살해되었다.

'손가락총'도 동원되었다. 당시 여수군청 직원이었던 김계유는 "세 곳에 모인 시민들에 대하여도 살아남은 경찰관이나 우익진영 요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소위 '심사' 라는 것을 했는데, 시민들 중에 가담자가 눈에 띄면 뒤따른 군경에게 '저 사람' 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즉결처분장으로 끌려가는 판이니 누구나 산목숨이라고 할 수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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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들에 의하여 여수서초등학교 교정으로 붇찹혀 온 여수시민 청장년들이 자기 집들이 불타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으로 잡혀있는 광경. 반란 동조 혐의자로 판명되면, 이곳 학교 뒤 교정에서 즉결처형(참수&총살) 되었다. 오른쪽 대열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부역 혐의자들로서, 이들 중 89명이 11월 1일 처형되었다.

그 손가락질은 곧 총살 대상을 지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손가락총'이었다. 홍영기는 "지역공동체 성원 간에 자행된 '손가락총'은 인간성 말살과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심사' 과정에서 '손가락총' 이라는 말이 유행하였으며 중상모략이 난무했었다. 이로 말미암아 무고한 희생자가 더욱 많아졌고, 그 희생의 주체가 누구인지 애매한 경우가 많았음은 물론이다"라고 말했다.

토벌군이 작전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조작과 반란군을 놓친 것에 대한 분풀이의 잔인성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5연대 지휘관인 대위 김종원의 행태였다. 5연대가 상륙작전을 하면서 마구 쏘아댄 박격포탄에 반란군이 아닌 12연대 수색대가 맞아 중대장과 하사관 1명이 전사했다. 그 어이없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김종원은 반란군을 찾아 돌산섬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수색했지만 허탕을 쳤다.

독이 오른 김종원은 아무 증거도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군내리에서 3명, 남면 안도에서 20여 명을 죽이고, 중앙국민학교에 자리잡은 부대로 돌아와 붙잡혀 온 청년들을 보고 "이놈들에게 칼 시험이나 해 보겠다"며 들고 다니던 일본도를 빼들고 한 청년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청년이 중상을 입고도 피를 흘리며 다른 청년들 뒤로 몸을 피하자 김종원은 계속 칼을 휘둘러 7명의 젊은이를 모두 죽였다. 희대의 즉결 참수(斬首)였던 것이다. 김종원은 6.25 때 '백두산 호랑이' 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바로 그런 인물이 유능한 군인이나 경찰로 대접받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0~1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