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7. 30. 22:57
3.군경(軍警)의 잔인한 보복극

1948년 10월 20일 정보는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인 준장 로버츠, 국방장관 이범석,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다음날 광주에 여순반란사건을 진한하기 위한 작전지도부를 세우기로 결정했고, 이튿날 여수와 순천 지역에 게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3일 간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23일 미 군사고문관의 지휘를 받아 탱크와 함포사격 등의 지원을 받아 여수와 순천에 대한 집중공격을 실시했다. 23일 순천을 장악했고 25일에는 여수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탈환했다.

순천에서부터 군경(軍警)의 잔인한 보복극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순천의 모든 성인 남자들을 순천북초등학교 교정에 감금해 놓고 엉터리 선별 심사를 통해 가려낸 사람들을 각목과 쇠사슬, 그리고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악질적'이라고 판단된 10여 명을 교정에서 총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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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붙잡혀 온 여수여고 학생들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의 차석 검사인 박찬길이 총살당한 사건은 당시 무법(無法)의 광기(狂氣)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말해 준다. 경찰이 뒤집어씌운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는 조작된 것이었다. 박찬길의 즉석 총살은 그간 경찰이 검거한 좌익인사를 박찬길이 법 규정대로 처리해 빚어진 경찰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당시 경찰은 검찰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여수 진압작전은 10월 26일부터 시작되었다. 전 육군 병력의 3분의 1인 5개 연대와 7척의 해군 함정, 그리고 전 공군력에 해당하는 10대의 비행기까지 총동원되었다. 그런 여수에 대한 대대적인 봉쇄와 포격 이후 진압군이 막상 여수에 진입하고 보니 시내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반란군은 이미 24일 밤 소형 선박을 타고 탈출해 산 속으로 도주했던 것이다. 중위 김지회 등 반란군 1천여 명은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장기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남한 무장 유격전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일부 역사서엔 진압군이 26일과 27일 양일간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고 기록돼 있지만, 그건 사실과 전혀 달랐다. 이런 기록이 시사하는 건 당시 진압군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치열한 시가전'을 부각시켜야만 하는 압력을 받고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그 엄청난 병력과 장비를 동원한 대작전이 웃음거리로 전락한다면, 그건 군으로선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압군은 여수로 오는 도중에 반란군의 습격을 받아 혼비백산했었기 때문에 여수 진압작전을 전개할 때엔 "경악과 분노, 집단 히스테리 산태"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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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민간인들



그래서 애꿎은 민간인들이 있지도 않았던 '치열한 시가전'의 증거물로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진압군은 여수 서국민학교에 4만 명을 집결시켜 놓고 보복 대상자를 골라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여수여중 운동장 등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현장을 목격한 한 미국 기자는 『라이프』지 48년 12월 6일자에 쓴 기사에서 "이곳에서 폭동을 진압했던 정부의 군대가 반란자들의 잔학행위와 같은 짓의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오히려 그들보다 더한 보복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라고 썼다.

"한쪽에서는 그 광경을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징벌의 장면을 말하라고 한다면, 보고 있는 아녀자들의 숨막힐 것 같은 침묵과 자신들을 잡아온 사람들 앞에 너무나도 조신하게 엎드려 있는 모습과 그들의 얼굴 피부가 옥죄어 비틀어진 것 같은 그 표정, 그리고 총살되기 위해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한마디 항변도 없이 침묵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마디의 항변도 없었다. 살려 달라는 울부짖음도 없고 슬프고 애처로운 애원의 소리도 없었다. 신의 구원을 비는 어떤 중얼거림도 다음 생을 바라는 한마디의 호소조차 없었다. 수세기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울 수조차 있었겠는가."

10월 하순 해양대 학생으로 승선 실습을 하고 있던 리영희는 여순사건의 참혹한 현장을 보게 되었다. 그는 부산에서 여수로 출동한 함정에 타게 돼 진압 후 여수여자중학교에서 목격한 장면을 이렇게 증언했다.

"운동장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즐비해 있었고, 반란군과 진압군 쌍방의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젊은 민간인들이었다. 운동장 울타리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먼 발치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나는 동료 학생들을 재촉해서 그 자리를 빨리 떠나버렸다. 멸치를 뿌려놓은 것처럼, 운동장을 덮고 있는 구부러지고 찢어진 시체들을 목격한 후회와 공포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울타리 밖에서 울부짖고 있는 남녀노소의 시선이 두려워서였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76~1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