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8. 4. 00:04
6. 사망자 2천 600명

여순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끔찍했다.

여수 지역 국회의원 황명규는 정부의 진압과정에서 여수에서는 3천 400여 가옥이 불에 탔고, 약 2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여수에 진압군이 들어온 26일, 그리고 27일 불이 났을 때 소방서장이 불을 끄려고 사람들을 모으자 5연대장 김종원이 총대로 서장을 구타하여 쫓아냈다는 증언은 이 불이 진압군의 의도적인 방화였을 가능성을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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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와중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참혹한 모습 I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여순사건으로 인해 토벌군은 141명이 사망, 263명이 실종, 391명이 반란군 측에 합류했으며, 반란군은 821명이 사망했고 2천 860명이 체포되었다. 48년 11월 말 미군 소식통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약 1만 7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반란군에 참가했다는 혐의를 받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그들 중 866명이 사형언도를 받았다.

전라남도 보건후생국은 11월 1일 여수에서는 약 1천 300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약 900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37억 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으며, 순천에서는 1천 135명이 사망하고 103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천350만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고 보고했다.

보성(80명), 광양(57명), 구례(30명), 고흥(26명), 곡성(6명) 등에서도 약 2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여순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2천600명이 넘었고, 중경상자는 약 1천500명, 행방불명이 825명이었다.

『한국전쟁사』를 필두로 한 공식 기록물들은 그 수많은 사망자들을 "인민재판 등 폭도들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인민재판이란 구경꾼 앞에서 하는 재판인데 그걸 봤다는 증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무얼 말하는가. 10월 26일 진압작전 이전까지 반란군 치하에서 희생된 사람은 경찰관 74명과 우익인사 등 민간인 16명뿐이라는 설과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모두 155명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 만약 반란군이나 폭도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그 유족은 군경 유가족에 준한 대접을 받을 수 있고 부역자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왜 지금까지 침묵만 지키고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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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와중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참혹한 모습 II



미국은 여순사건에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고문단장 준장 로버츠는 진압군 측에 무기, 탄약, 휘발유, 식량 등을 무제한 공급하였다. 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 책임자였던 대위 짐 하우스만은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미 국방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미국 측은 여순사건의 진압이 '성공적' 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군의 작전 능력과 순발력을 과시한 계기"가 되었고 "(경찰 보조 병력으로 산돼지 몰이나 하던) 한국군 현대화의 시발"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건 발생 사흘째인 10월 21일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은 기자회견에서 사실상 김구를 겨냥하여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서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으며, 그래서 시중에는 여순반란에 김구의 선동이 작용하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주한미군 정보참모부는 김구가 반란을 선동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기록하면서 그 근거로 ① 경비대 내에 김구의 추종자들이 상당하며, 반란의 공격 목표가 현 정부라는 점, ② 사건 직전 김구가 전남 광주를 방문했다는 점, ③ 이범석이 여순반란에 우익들이 개입했다고 발표한 점 등을 들었다. 김구는 10월 27일 기자회견에서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3~1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