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7. 27. 14:49

1.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1948년 10월 15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는 육군 사령부로부터 19일 오후 6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은 제14연대 내의 사병들을 갈등 속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중위 김지회와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전남도당 소속의 군인들은 월불(越北)이냐, 제주로 가는 길에 선상(船上) 반란이냐, 아니면 여수에서의 봉기냐 하는 세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였다. 결국 이들의 선택은 여수에서의 봉기였다. 이들은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는 주장을 비롯하여 남로당의 평소 선전 구호들을 외치면서 다른 군인들을 선동하여 제주 사태의 '진압군'으로 가는 대신 여수에서 '반란군'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반란군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반란을 일으킨 지 불과 네 시간 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파출소, 시청, 군청 등 치안기관과 행정기관을 장악했으며, 우익계 인사와 경찰관을 살상했다.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명,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 후원회장 등을 포함하여 우익계 인사와 그 가족 수십 명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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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신문기사

여수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반란군 2천 명은 순천으로 이동해 중위 홍순석이 지휘하는 제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힘을 합쳐 오후에는 순천까지 수중에 넣는 데 성공했다. 반란군은 다음날인 21일에는 인근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10월 20일 약 3만여 명의 여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민대회가 열렸고, 인민의용군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반란군은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이고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인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명령에 대해서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총궐기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인민위원회의 여수 행정기구 접수, 반동적 이승만 종속정권 처벌,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를 살포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73~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