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승만 정권의 여론 조작 진압군이 주민들을 초등학교로 이송중인 모습 반란군에 희생된 경찰관&의용단원
토벌군과 정부는 허위사실까지 유포하여 '여순 지역 죽이기'에 나섰다. 어린 여학생들이 총을 들고 싸웠으먀 국군에게 '오빠!' 하고 달려가서 치마 속에서 총을 꺼내 국군을 죽였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전혀 사실무근이었지만 널리 유포된 이야기였다.
그런데 바로 이런 식의 이야기와 소문이 정부의 강경 대응책을 내놓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8년 11월 4일 여순사건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앞잡이'가 되었고, 여학생들도 심하게 반란군에 가담하였다고 발표해 여론을 호도하였다.
엄격하게 동제된 신문들에 의한 여론조작은, 학살은 은폐하고 '미담(美談)' 수준의 이야기만 양산했다. 임종명이 이 시기 신문기사들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처음에는 "양민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작전" 대신 "소극적인 작전"도 마다 않았던 "관군"이 시내에 돌입해서는 "먼저 식량창고를 탈취하여 시민의 식량을 확보"하고 "서(西)국민학교나 여수국민학교에 수용"된 "피난민에게는 주먹밥을 나누어 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국군"의 모습을 재현했으며, "국군"은 "인명을 보호"하는 수호천사로 묘사되었다.
또 문교부는 문인들을 현지에 파견해 시찰을 시킨 다음 정부에 유리한 글을 쓰게 했다. 박종화, 이헌구, 정비석, 최영수, 김송 등은 서울역에서 문교부장관의 전송을 받으면서 기차를 탔다. 『동아일보』 48년 11월 24일자에는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한 작전장교의 언급을 박종화가 윤색하여 정리한 글이 실렸다.
이승만 정권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전역에 게엄령을 확대했으며, 게엄령은 다음해 49년 2월 5일까지 지속되었다. 정부는 반란을 일으킨 14연대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전국적으로 각 건물에서 4호실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고, 토벌작전에 지장이 있다고 3개월 동안 여수-서울 간 열차를 없애 버리고 전주-서울 간만을 오가게 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1~183쪽
2007. 8. 2. 2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