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8. 4. 22:32
7. 숙군(肅軍) 작업과 박정희 체포

여순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숙군(肅軍)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군법무관 김완용을 불러 "한 달 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아 죽이고 오라"면서 숙군 작업을 몰아붙였다. 남로당 세력뿐만 아니라 광복군 계열까지 제거대상으로 삼은 숙군 작업은 48년 10월부터 49년 7월까지 진행돼 전 군(軍)의 약 5%에 달하는 4천749명을 숙청하였다. 이 중 2천 명 이상이 총살형을 당했다. 초급장교와 하사관의 경우엔 전체의 3분의 1이 체포, 구금, 처형, 또는 제대당했다. 군 내부의 반공이념교육도 더욱 강화돼, 48년 11월 29일 국방부 내에 반공이념교육을 목적으로 한 정치국(후에 정훈국으로 개칭)이 설치되었다.

숙군은 증거주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많은 무리가 있었다.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내는 식이었고, 다른 좌익을 대라고 또 고문을 가하는 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총살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거나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며 죽어간 이들도 있었다. 이런 식의 고문수사를 통한 숙군 작업에 탁월한 면을 보여 나중에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특무부대장이 된 인물이 바로 김창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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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 작업의 와중에서 48년 11월 11일 소령 박정희도 체포되었다. 42년 만주군관학교 졸업, 44년 4월 일본 육사 졸업 후에 44년 7월 일본 만주군 소위로 부임한 박정희는 해방 후 베이징으로 가서 광복군이 되었다가 46년 12월 경비사관학교 2기를 졸업했는데, 여순사건이 터지자 우습게도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되었다. 우습다는 건 그가 남로당 프락치였기 때문이다.

만주군에서 광복군으로 변신했던 박정희는 좌익에서 우익으로 또 한번 변신을 꿈꾸고 군부 안의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 수사에 적극 협력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은 것이다. 군내 남로당의 조직표까지 그려서 제출했다. 박정희는 일단 기소돼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남로당원 색출의 공로를 인정받은 데다 그의 만주군 선배들이 적극 구명운동에 나서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반공(反共) 국가'를 완성시키기 위한 계기로 간주하여 이후 전사회의 병영화를 위한 방안들을 계속 내놓게 된다. 한국 사회가 반공을 국교(國敎)로 삼다시피 하는 외길로만 내달리는 동안 여순사건은 악명(惡名)과 오명(汚名)을 뒤집어쓴 채 피해자들은 숨을 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여순사건이 거의 진압되어 가던 9월 29일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은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아주 모호해서 정권이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11월 14일자 사설 <국가보안법을 배격함>은 국가보안법이 "크게 우려할 악법이 될 것"이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6~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