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양민학살사건'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01.24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 2
  2. 2017.01.23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 1
posted by Belle〃♬ 2017. 1. 24. 21:33

미군의 인종 차별주의


괴로운 이야기지만, 미군은 한국인의 목숨을 하찮게 보는 강한 인종 차별주의를 갖고 있었다. 단지 인종 차별주의 때문에 한국인을 함부로 죽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전쟁이건 군인들은 오직 전쟁 수행의 효율성만으로 전쟁을 치르진 않는다. 고려해야 할 다른 요소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민간인들의 목숨일 것이다. 전쟁 수행에 상충되는 요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요소들의 무게나 가치를 비교적 낮게 평가하는 심리 상태에 인종 차별주의가 알게 모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건 결코 무리한 추정은 아닐 것이다.


미군 장성 로톤 콜린스는 한국전쟁은 "현대전보다는 우리의 인디언 개척 시절 전투와 더 유사한 구식 전투로의 회귀"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이 말에 인종 차별주의의 혐의를 두는 건 부당한 일이겠지만, 전쟁의 대상이 어떤 인종인가에 따라 미군의 대응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의미는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해방정국의 역사에서 살펴보았듯이, 미군은 한국인들을 결코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 미군 중위가 말했듯이, "문화인들이라면 대체로 조선인들을, 동양인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우리가 여기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를 여기에 오랫동안 방치하지 않는다."


사실 미군이 한국인을 존중하거나 좋아한다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얼마 후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메튜 리지웨이는 회고록 『한국 전쟁』에서 "미군들이 한국전에서 기억하는 것은 오 천지에 깔린 똥냄새 뿐"이라고 썼다. 똥냄새만 미군을 괴롭힌 건 아니었을 것이다. 손철배에 따르면,


"우선 겉으로 드러난 한국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은 한국을 보다 깊이 이해하려는 생각을 아예 꺾어 버렸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으로서 경제적 풍요가 절정에 달했던 미국과 폐허가 된 한국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으므로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들은 자부심이 강하고 점잖다는 설며에 미군 병사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본 한국인들은 모두 추한 꼴의 거지이거나 짐승들도 살기 어려운 움막에 살고 있는 농민뿐이다. 그들은 자부심과 예절은 고사하고 문명화되지도 못한 미개인에 불과하다'라고 반박하기 일쑤였다. 실제로 미군들만 보면 '헤이 싸전(sergeant), 기브 미 초콜릿, 기브 미 캔디' 하면서 달려드는 고아 같은 어린이들과 틈만 나면 뭔가를 훔쳐가는 한국인들을 자주 접하며 좋은 인상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인들의 좀도둑질은 미국인들의 첫째가는 조롱이었다. 당시의 유명한 코디미언 밥 호프는 한국 아이가 비행기의 랜딩 기어를 훔쳐갔기 때문에 위문공연에 늦었다고 조크하여 청중들의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어니 미국인은 파카 만년필을 일부러 드러내놓고 돌아다니자 하룻동안 네 번이나 소매치기 당할 뻔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 견해는 이후 한국전쟁이 진전되면서 미군들이 한국인들에 대해 갖게 된 생각까지 포함하고 있지만, 이미 3년간의 군정 경험을 갖고 있는 미군들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한국인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미군은 한국인의 옷을 '흰 파자마'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흰 파자마'를 입은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였다. 영국의 전쟁 특파원 레지날드 톰슨은 『한국의 통곡』이라는 책에서 "미군 헌병들은 적들을 사람처럼 이야기하지 않고 원숭이처럼 취급한다"고 썼다. 톰슨은 "그렇지 않으면 이 천성적으로 친절하고 너그러운 미국인들이 그들을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죽이거나 그들의 집과 빈약한 재산을 박살낼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군의 인종 차별주의는 가끔 한국인들에게 기존 좌우 구분의 의미를 회의하게 만들기도 했다. 윤택림에 따르면,


"미군의 인종 차별주의가 한편으로는 지방 좌익뿐만 아니라 우익을 분노하게 했다. ······ 우익 청년들은 종종 한국 사람을 동물로 생각하고 좌익 색출시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아대는 미군과 싸움이 붙었다고 한다. ······ 이러한 인종 차별적인 과잉 반응은 미군 병사와 한국 우익집단 간의 계속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44년간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


노근리 사건은 44년간 '잊혀진 사건'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으로 머물러야 했다. 1994년 6월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정부 요로에 진정서와 탄원서를 냈지만 모두 답이 없었다. 노근리 사건은 『조선인민보』 1950년 8월 19일자가 6단 크기로 상세히 보도한 이래로 1994년 4월 29일 연합통신에 의해 첫 보도가 이루어지고 『월간 말』 94년 7월호에 의해 상세히 다루어지기까지 44년간 언론매체에서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1999년 9월 미국 AP 통신이 보도해 세계적 이슈가 되고 나서야 한국에서도 노근리 사건이 큰 이슈가 되었다. 99년 10월 초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과 한국 대통령 김대중이 진상 규명 지시를 내렸다. 2001년 1월 12일 클린턴은 사과 성명을 냈다. 유족들은 미국보다는 한국 정부에 맺힌게 더 많다. "군사정권 때야 아무 소리도 못하지. 술김에 벙끗하기만 해도 바로 경찰서에 데려갔다."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한 미군 병사는 그때로부터 49년이 지나서도 "아직도 바람 부는 시절이 되면 어린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고백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23. 13:25

미군의 3박4일 인간 사냥


1950년 7월 26일 낮 충북 영동군 황간면 임계리와 주곡리 마을에 미군이 나타나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 미군은 제1기갑사단 제7기갑연대 제2대대 H중대(중화기 중대) 군인들이었다. 미군의 명령에 따라 500여 명의 피난민들이 4번 국도를 따라 인근 마을 노근리에 당도하였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경부선 열차의 철로로 올라섰다. 그 때 미군의 무전 연락을 받은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하였으며 지상의 군인들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철로 위에서만 최소 100여 명이 사망했다.


정구식의 중언이다.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 다시 정신을 차려 둘러보니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였고 여기저기서 사람과 소가 쓰러져 야비규환이었죠. 미군 폭격기는 약 20여 분간 폭격을 해댔어요. 나중에는 폭격기에서 기총소사도 했고요."


양해찬의 증언이다.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있다가 폭격을 당했어요. 어머니가 나를 맨 밑에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내 여동생을 얹고 당신 몸으로 우리를 감쌌어요. 폭격 후 일어서니 어머니는 하복부와 발목에 파편을 맞아 피투성이고 여동생은 한쪽 눈이 피범벅이 돼 있어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지만 여동생 눈알이 빠져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구요. 동생은 눈이 아파 견딜 수 없으니까, 안 보이니까 그것이 뭣인지도 모르고 그냥 떼내 버렸어요. 어머니와 동생을 껴안고 주변을 보니 우리 집에 피난와 있다 함께 온 고종사촌 아주머니가 만삭이었는데 즉사해 있더라구요. 할머니, 형님도 거기서 돌아가셨지요."


철로 위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사람들은 철로 밑의 굴다리에 숨었다. 그러나 굴다리에 은신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미군의 총질은 계속되었다.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총질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핏물을 그냥 떠마시면서 버텨야만 했다.


이게 바로 1950년 7월 26일부터 3박4일간 미군의 '인간 사냥'으로 300여 명이 죽어간 '노근리 사건' 이다.




피난민은 작전에 귀찮은 존재


왜 미군은 그런 '인간 사냥'을 했던 걸까? 먼저 이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T.R. 페렌바크의 『실록 한국전쟁』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1950년 7월 20일 아침, 대전 주변 방어선이 끊임없이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농부의 흰 옷으로 변장한 수백 명의 인민군은 시중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일단 시중에 들어서면 그들은 농민의 옷을 벗어 던지고 미군에게 총격을 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처에 저격병이 깔렸다. 미군 장교들은 본부요원과 보조부대 병력을 동원해 그들의 소탕을 시도해 보았지만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어느덧 긴 하루해도 저물었다. 딘 사단장은 시내에서 철수해야 할 때가 온 것을 알았다. 딘의 지프는 길 위에 멈춰 서서 불을 뿜는 트럭들 사이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렸다. 운전병은 전속력을 냈고, 한 구역을 다 간 곳에서 교차로 하나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단의 부관 클라크 중위가 고함을 질렀다. '지나왔다!' 간신히 대전을 빠져 나온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우군 진지에 닿으려는 노력을 35일이나 거듭하다 한국인들에게 의해 인민군에게 밀고되어 포로가 되었다. 7월 20일 야간에 대전을 철수, 영동을 지키던 미 제24단의 각 부대는 7월 22일 정오, 진지를 제1기갑사단에게 인계했다. 대전에서 100여 리 떨어진 영동 방어를 미 제24가단으로부터 인수받은 미 제1기갑사단은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런 배경에 주목하여 당시 미군들이 느꼈을 극도의 공포심을 인간 사냥의 이유로 지적하는 시각이 있다. 당시 미군들의 북한군에 대한 피해의식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데다 미군이 농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에 의해 습격을 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겁에 질려 이성을 잃은 나머지 저지른 짓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은용은 그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미군들은 노근리 앞 철로 위에다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피난민들의 짐 검색을 실시하고, 또 폭격 후에는 철로 밑 터널 속에 그들의 위생병을 보내 부상자들을 치료까지 해주면서 피난민들이 변장한 인민군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확인했었다. 무기라고는 한 점도 갖지 않았던 피난민들, 노인과 부녀자, 유아가 절반을 훨씬 넘었던 이들로 인해서 미군들이 겁을 먹을 이유도, 이성을 잃을 까닭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많은 생각끝에 도달한 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7월 26일 미 8군사령관이 주요 지휘관에게 보낸 메시지에 주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전선을 통과하려는 피난민들의 어떤 움직임도 허용하지 말라." 그 날 10시 미 제25사단 일지에는 "사단장 킨 장군이 전투 지역에 있는 민간인들을 '적대시하고 사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노근리 사건 이후에도 피난민에 대한 무조건 사격은 많이 일어났다. 제 1기갑사단 1950년 8월 29일자 일지에는 사단장이 "모든 피난민들을 향해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돼 있다.


왜 미군 지휘부는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피난민을 작전에 방해되는 귀찮은 존재로만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노근리 학살은 워낙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범죄라 이쪽에 무게가 실린다. 단지 귀찮다고 아무런 죄도없는 민간인을 죽일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노근리 사건을 넘어서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미군이 보인 행태와 직결되는 것이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