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9. 20:12

'해방의 선물은 기근'


1946년 10월 1일에 발생한 대구항쟁은 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몇 개월 전 대구 [영남일보]는 "쌀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썼다가 이틀간 정간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1946년 대구의 식량사정은 어떠했던가?


1945년 11월에 쌀 한 말 가격은 140원이었지만, 1946년 9월 말에는 1,500원으로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10배 이상이나 올랐다. 시민들은 쌀을 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굶주려야만 했다. 문자 그대로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초근목피(草根木皮)의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민학교 학생 중 80% 이상이 결식아동이었으며, 그로인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결석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전매청의 연초공장 노동자들은 심지어 담뱃잎을 마는 종이에 붙이는 풀까지 먹었다.


당시 전평 대구화학노조 서기 이일재의 증언이다.

"기아상태가 어느 정도 심각했느냐 하면 전매청의 연초공장에서 담배를 말아 붙이는 데 쓰는 풀이 나오면 직공들이 그 풀을 다 먹어치워 버릴 정도였어요. 풀을 먹지 못하게 검고 붉은 물감을 섞어서 내놓았지만 그것조차 몰래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지경이었어요. 그런데도 미군과 경찰은 굶주림으로 힘 없이 누워 있는 사람들을 콜레라에 감염되었다고 환자들만 격리 수용되는 곳으로 싣고 갔는데, 그러면 영락없이 죽고 마는 거지요."


1946년 4월 [영남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 그대로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세상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5월에는 콜레라마저 발생하여 대구시만 1,200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진 데다 그로 인해 외부에서의 쌀 반입도 끊기게 되었고, 6월에는 수해가 발생하여 쌀 대체작물이 큰 피해를 입은 데다 교통마저 두절되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나 몰라라 했다. 굶어죽게 된 시민들이 군정에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자, 미군정 관리는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조선에는 빵, 고기, 과일 등이 많은데 왜 쌀만 요구하느냐"고 질책하였다.


대구의 정치적 사정도 다른 지역과는 달랐다. 대구의 좌익세력은 일제하에서 어느 세력보다 더 치열하게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 왔기 때문에 시민들의 강한 신뢰를 얻어 해방 후에도 각 부문별 대중조직을 결성하여 폭넓은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 우익세력엔 친일파가 많아 대중적 기반이 매우 취약하였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