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10. 19:10

'내쟁(內爭)에만 용감한 백성'


진압 후에도 대구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끊이지 않았다. 김두한의 대한민청을 비롯한 우익 청년당원들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귀속가옥에 급조한 유치장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 가두면서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경찰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2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된 10월항쟁에는 약 300만 명이 참여했는데, 경찰 200명 이상이 피살되었고, 죽은 관리, 시위자 및 민간인 수는 1천 명이 넘었다. 체포된 사람은 3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하지(존 하지, John Reed Hodge, 주한 미군 사령관 겸 미군정 사령관)는 대구항쟁시 남한을 '끓고 있는 화산', '화약 상자'로 비유했지만, 주된 원인 제공자는 미군정이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구항쟁의 배경에 대해 김삼웅은 "전평 등 좌익의 조종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해방 이후 새로운 민주사회의 건설에서 제반 개혁의 요구가 좌절된 데 대한 민중의 항거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처벌되기는커녕 당당하게 재동장하는 친일파, 토지개혁의 지연, 미소공위 결렬로 통일정부 수립 기대에 대한 좌절, 미군정의 공장 접수, 만연하는 실업난과 물가고, 귀환동포에 대한 무대책 등이 민중들에게 극심한 좌절감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이런 상황에서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일제의 공출이나 다름없는 미군적의 하곡·추곡에 대한 강제매입과 극심한 식량난이었다."


언론인 오기영은 월간 『신천지』 47년 11월호에 쓴 글에서 이 사건에 대해 "나는 일찍 만보산사건을 빌미로 일어났던 중국인 배척 사건을 평양에서 목격하고 제 살을 깎고 뼈를 저리게 하는 압박자에게는 지친 듯이 유순하던 조선 사람이 이역에 와서 날품팔이하는 고독한 중국인에게는 어이 이리 잔인한가를 통탄하였습니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그때는 그래도 만주에 있는 동포가 학대되었다는 적개심에서 폭발된 참극입니다마는 40년이나 우리의 피를 빨던 왜구는 뺨 한 개 친일 없이 주지 말라는 돈까지 몰래 주어서 고이고이 돌려보내더니 이제 골육간에 이런 피를 흘리다니 이래도 이 땅에 풍년을 주는 하늘의 은혜가 그지없이 두렵습니다. 외적에게 무력하고 내쟁(內爭)에는 용감한 백성이라고 나의 어느 선배는 말한 일이 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하여 나는 이것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