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7.01.17 국민방위군 사건 - 3
  2. 2017.01.16 국민방위군 사건 - 2
posted by Belle〃♬ 2017. 1. 17. 16:00

규명되지 않은 정치자금 조성 의혹


1951년 7월 5일 방위군 사령부가 있던 대구 동인국민학교 강당에서 열린 육군고등군법회의장에는 물론 교정에까지 방청객이 꽉 차 고성능 마이크까지 가설했다. 검찰관인 중령 김태청은 추상과 같은 논고를 폈다.


"휘하 장병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는 순간에도 그들은 따뜻한 요정에서 기생을 옆에 끼고 양주 가효(맛 좋은 안주)로써 유흥삼매하였던 것이니, 이로 인해 이름 모를 언덕에 원혼이 된 애국 장정의 수는 또한 얼마나 되겠습니까? ······ 피고인에게 묻노니 그대들 귀에는 이 삼천만 민족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 공개 법정에는 전 육군참모총장인 소장 정일권도 증인으로 출정하였다. 김태청은 정일권을 향해 무슨 이유로 일등병 경험조차 없는 김윤근이 준장과 사령관이 되었는가를 비롯해 다섯 항목의 질문을 던졌다. 정일권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모두가 이승만의 명령이었다고 대답했다. 전시 특명검열관인 준장 김석원은 정일권의 답변을 '책임회피'로 판정하고, 퇴장하는 정일권에게 다가서서 "이봐, 지금의 답변이 그게 뭔가. 당장 견장을 떼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석원은 달려온 장교에게 제지되었고, 정일권은 말없이 사라졌다.


1951년 7월 19일 김윤근·윤익헌·강석한·박창원·박기환 등 5명은 사형을 당했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김윤근을 외국으로 빼돌릴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대구 교외의 야산에서 이루어진 총살형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처형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은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처형 집행 후 국민방위군 간부들에 의해 부정 처분된 예산이 이승만 정부와 정부 고위층에 유입되었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어 정치 쟁점화 되었다. 국회의원 김종회는 국민방위군용 군수물자를 부산으로 유출, 3억여 원을 횡령하여 이를 이승만의 비서에게 정치자금으로 전달하였다는 폭로를 하였고, 국민방위군 예산이 국회 내 이승만 지지 세력 및 정부 고위층, 군부 내의 간부 등에 정치자금으로 유출되거나 뇌물로 상납되었다는 주장들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사건 당사자들이 너무 일찍 처형됨으로써 많은 의문을 남긴 채 종결되고 말았다. 한홍구에 따르면,


"당시의 관찰자들은 국민방위군 사건은 단지 정부의 준비 부족이나 방위군 지휘부의 예산 횡령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성모가 이승만 이후를 노려 자기의 정치적 지지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대한청년단 출신들이 많이 포진한 신정동지회라는 단체를 후원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예산을 빼달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군 병사는 죽을 때 '빽'하고 죽는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이승만 정권에서 저질러진 총체적 부패구조의 완결판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 부패구조는 단지 불법적으로는 돈을 먹는다든가 하는 차원을 떠나 국가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의 것이었다. 분노라는 것도 웬만한 수준이 되어야 터뜨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김동춘은 국민방위군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국가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전쟁 상황에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도 장정으로 끌려간 것이 몹시 주변머리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야릇한 부끄러움이 있었다고 한다. '국가 부재'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인민군과 국군 가운데 어느 쪽으로 징집되더라도 그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저 도망가서 일신의 생을 도모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공권력의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지탱하는 일에 대해 누구도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된다. 국민들은 지금도 돈 있고 배운 사람들은 다 외국으로 도망가고, 못 배우고 없는 사람들만 나가 싸우다 죽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죽으면서도 '빽' 하고 죽었다고 한다.


왜 '빽' 하고 죽었을까? 홍성원의 해설을 더 들어보자.


"한국 병사는 전방에서 전투 중에 전사할 때 '어머니'를 부르는 대신 '빽' 하고 죽는다고 한다. 그는 백이 없어서 안전한 후방으로 못 빠지고 최전방 고지에서 적탄을 맞아 죽게 되었다. 자기의 죽음이 백 때문임을 알고 그는 백에 원한이 사무쳐서 최후의 순간에도 '빽' 하고 죽는다는 이야기다."


서중석은 임시 수도 부산에서 주전론은 애국이요, 반전론은 매국으로 규정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전론자들은 전장에는 남의 자식들이 나가서 싸워 이겨주고, 나는 돈이나 벌어보자는 식이었다.


"권력을 쥔 자, 가진 자들은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고, 보낸다 하더라도 안전한 후방에 배치되도록 '빽'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대학은 징집 면제를 받으려는 학생들의 은신처로 되어 ······ 군대는 주로 못살고 힘없는 농민의 자식들이 갔다."


백마부대장 김운기의 회고다.


"각종 전투를 하면서 부를 누리고 권세 있는 집안의 자식이 군에 들어왔다는 말은 과문한 탓인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리영희도 일선에서 그런 부패상을 원 없이 목격했다. 가지고 배운 집자식들은 일선에서 후방으로 빠지고 목숨 걸고 싸우러 가는 군인들은 죄다 가난하고 못 배운 집 자식들이었다.


"학교깨나 다닌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가고, 이 틀림없는 죽음의 계곡에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 나라의 불쌍한 자식들만이 보내지는가? 나라 사랑은 힘없는 자들만이 하는 것인가? 전쟁과 군대를 알게 될수록 나는 점점 더 사색적으로 되어 갔다. 그럴수록 이 나라의 기본부터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6. 15:47

김윤근·신성모·이승만의 적반하장


이 '해골의 행렬'을 목격한 야당 의원들에 의해 국회에서 1951년 1월 15일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사령관인 김윤근은 1월 20일 기자회견을 통해 "백만 국민병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일부 불순 세력들이 국민방위군 편성에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음은 실로 유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제2국민병의 참상에 대한 비난을 불순분자의 선동이라고 몰아붙였다. 국회에 출석한 국방부장관 신성모도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여러분은 제5열의 책동에 동요하지 말기 바란다"고 훈시하였다.


국회는 '국민방위군 의혹사건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신성모는 "국방부장관의 책임하에 있는 본 사건의 책임자 김윤근을 국회에서 조사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 최종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기 때문에 신성모가 방패막이를 자임하고 나섰을 것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민방위군 부대의 운영을 이승만의 친위조직인 대한청년단과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청년방위대에 맡겼기 때문에 저질러진 것이었다. 대한청년단 단장인 김윤근은 민간인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 등 청년단 간부들도 대령, 중령으로 임명되었다.


김종오에 따르면, "원래 김윤근은 씨름꾼 출신으로 일제 때 일본군 사병으로 복무했는데 해방이 되자 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6·25를 전후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되었다. 김윤근이 저지른 방위군 사건을 문제삼아 국회가 신성모 장관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 대통령은 '강을 건너다 말을 바꾸어 탈 수 없어!'라고 일축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신성모는 수사를 방해하다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사위인 김윤근은 빼돌리고 부사령관 윤익헌 선에서 처벌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래서 군사법정을 구성하면서 자신의 친구인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을 재판장에 임명하였다. 이선근은 신성모의 뜻을 받들어 재판 개시 3일만에 서둘러 김윤근에게 무죄,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도 하는 수 없이 타협책을 강구했다. 국회진상 조사단의 중간 보고가 4월 25일로 국방부장관 신성모, 내무부장관 조병옥, 법무부장관 김준연을 사임시키는 내각 개편과 동시에 국회에서의 방위군 사건 중간 보고 발표의 중지를 요청하면서 사건의 확산을 무마하려고 했다. 3부 장관 사임은 2월에 일어난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책임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이승만으로선 동시에 터진 두 가지 큰 사건으로 수세에 몰리자 어떻게해서든 국면 전환을 꾀하고자 했을 것이다.




방위군 고위층의 거대한 예산 착복


그러나 진상조사 위원이었던 의원 서민호는 예정대로 중간 보고를 강행했다. 그는 보고를 통해 "그 동안 말하면 죽인다는 협박을 수없이 받으나 전혀 불순한 동기가 없음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한다"고 전제하면서, 방위군 간부들 대부분이 정치에 개입했으며, 상부의 명령임을 빙자하여 예산을 함부로 착복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이 보고에 따르면, 1950년 12월 17일부터 3월 30일까지 105일 동안 연 병력 7천58만2천940명의 유령 병력을 조작해서 모두 23억5천100여 만 원의 현금이 부정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방위군 사령부에서 제시한 통계를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식료품비의 조달 액수와 실제로 집행된 액수의 차이가 무려 20억 원에 달함으로써 결국 3개월 동안 55억원을 방위군 고위층들이 착복했다. 부사령관에 대한 기밀비용이 105일 동안에 무려 3억1천755만 원이나 지출되었고, 국회 내의 관련된 정파에 1억 원이나 흘러간 것 등 거대하고 복잡한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규명하려면 앞으로 최소한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보고 5일만인 4월 30일 '국민방위군 설치법 및 비상시 향토방위령의 폐지에 관한 법률안'이 상정되어 통과되었다. '해골의 행렬'을 시켜놓곤 이제 귀향하라는 것이었다. 신석상의 『신의 바람』에 따르면,


"그런데 이번에는 목적지 진주에 당도하자마자 해산을 시키면서 귀향하라니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어디 또 있겠는가. ······ '아냐, 나는 국민방위군의 책임자들을 다 고발할 거다. 군인을 모집해 놓고 거지를 만들어 귀향시킨 그놈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이냐. 또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매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으냔 말야.'"


최종 책임자는 이승만이었으나 이승만에 대한 고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윤근과 그 일행이 죽어줘야 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데다 그런 효과를 위해 재판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국방부장관이 5월5일 신성모에서 이기붕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기붕은 장관에 임명되고 나서 이 사건의 재심을 명했던 것이다. 이기붕은 이 일로 '인기가 급상승'하여 '이승만의 후계자로 부상'하게 되지만, 훗날 역사는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는 걸 보여주게 된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