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12. 18:55

반민특위의 와해


국회 프락치 사건에 대한 조사는 철저한 보안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3개월간 지속된 심리에서 국회의원들은 최고 10년에서 최하 3년까지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실형을 살던 중 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모두 석방되었다. 이후 이들은 대부분 북한으로 올라갔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그들이 '남로당 프락치'였다는 정부 측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로 쓰이고 말았다.


이에 대해 박원순은 "그렇게 학대받고 매도당한 조국, 대한민국에 계속 남아 있으라는 요구를 어떻게 그들에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들이 북한에서 대부분 강제노동소로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들은 양쪽의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분단의 피해자들이다"라고 말했다.


7월 2일, 이승만 정부와 친일세력은 1950년 6월 20일로 규정한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로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했고, 이는 논란 끝에 통과되었다. 7월 7일 반민특위 전원이 사임서를 제출했다. 당시 특위 위원장이었던 김상덕은 "공소시효가 단축되어 앞으로 50일 밖에 남지 않은 동안에 남은 반민자를 처벌할 자신이 없어 사표를 낸다"고 말했다.


반민특위는 49년 8월 22일 국회에서 폐지안이 통과됨으로써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반민특위는 출발 당시 반민자 7천여 명을 파악해 놓고 있었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조사 건수는 총 682건에 그쳤다. 이 가운데 체포 305건, 미체포 173건, 자수 61건, 영장 취소 30건, 검찰 송치가 559건이었다. 이 중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것은 221건이고, 특별재판부가 재판을 종결한 것은 불과 38건에 지나지 않았다. 불기소된 사람들은 대부분 무죄로 풀려났으며, 기소된 사람들 중에서도 실제 처벌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반민특위가 실패로 돌아간 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와의 유착 때문이었다. 이는 그것이 너무 늦게 시작되었다는 데에도 있었다. 해방 후 3년여가 지난 시점에선 이미 친일파가 막강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현실엔 김구와 한독당도 일조했다. 서중석은 "김구·한독당은 보수적 우익세력이기 때문에도 그런점이 있었고, 이승만·한민당과 합작하기 위해서도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르지만, 친일파 처단에 소극적이었다"며, "김구가 친일파를 우익을 더럽히는 군더더기로 비유하고 한민당을 신랄히 비판한 것은 1948년에 들어서였다"고 지적했다.




친일파 문제가 국민성에 미친 영향


그러나 그땐 이미 친일파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때였다. 친일파에게 대한 응징만이 능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친일파들이 사회 각계 권력의 핵심부에 여전히 포진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고 하는 점이었다.


반민특위 제1조사장 이병홍의 증언이다.

"친일 거두의 집에서 흔히 일본 황제의 사진이 벽상에 조심스럽게 걸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소위 교육칙어란 것을 가보처럼 모시어 둔 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우리들을 적지 않게 놀라게 하였다. ······ 그리고 어떠한 자는 태연하게 우리들 앞에서 이완용의 위대한 민족애를 강조하고 동상 건립의 필요를 역설까지 하였다. 어떤 자는 장차 우리들이 저들 앞에 심판받을 날이 불원할 것을 오연(傲然)히 말했다. ······ 이러한 사상의 소유자가 1949년대의 한국에 한 개의 거대한 세력으로 남아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 친일파 문제가 향후 한국 엘리트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극단적 이기주의, 그것을 국가의 이익인 양 속이는 기만, 그리고 그걸 멀리서 바라보다 체념하고 마는 민중의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고은의 <이종형>이라는 제목의 시는 그 풍경의 일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3·1운동 때 만세를 불렀다/파고다공원과/용산에서 만세를 불렀다/만세 끝/다음해부터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일제 밀정/만주 떠돌며/독림운동가 체포/독립운동 파괴공작에는/그가 있었다/명동촌 중학생들이/그를 처치하려다 미수에 그쳤다/해방 뒤 서울에 나타나/대동신문사 사장이 되었다/만주에서/독립운동가 15명 죽인 것을/일본군이 죽였다 했다/반민특위 투옥되어 유죄판결 받아싸/이승만이 석방시켰다/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참가/기름지게 애국자로 행세했다/제2대 민의원에 당선/연미복 입고 사진 찍었다/화신백화점 앞/새나라사진관 전시관을 차지했다/누구도 그 사진 전시대 유리창 깨지 않았다"


먼 훗날(2004년), 독립유공자 후손 10명 중 6명은 무직에 고졸 이하 '저소득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차라리 이때부터 하지도 못할 친일파 단죄보다는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에 대한 보상과 지원이나 법제화했더라면, 역사가 그렇게까지 뒤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1. 20:04

경찰의 6·6 반민특위 습격


1949년 5월 20일, 반민특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소장파 의원인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5월 23일 열린 임시국회에서는 구속 의원의 석방결의안을 놓고 이틀간의 격론을 벌였지만 이미 국회가 크게 외축된 탓에 88 대 95로 부결되고 말았다. 국회에서 구속 의원의 석방안이 토의되고 있는 동안에 서울 시내에서는 "국회 내의 빨갱이를 추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는 관제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석방동의안이 부결된 뒤에도 찬성표를 던진 88명의 의원에게 친일세력의 공격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친일세력은 5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민중대회'라는 집회는 열고, 구속 의원의 석방결의안에 찬성한 88명의 국회의원을 공산당이라고 몰아붙였다.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는 관제데모를 주동하면서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악선전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운하와 종로서 사찰과 주임이 6월 4일 특위 특경대에 반민 피의자로 체포되었다. 마포서장은 반민특위를 방문해 이들을 선처해 달라고 했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했다. 시경 사찰과 직원들은 이승만에게 48시간 안에 반민특위의 특경대를 해산시켜 달라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


그 요구는 이승만이 자기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경찰 간부들은 실력행사를 하기로 모의하고 내무차관 장경근의 허락까지 얻어냈다. 장경근은 이승만의 사전 양해가 있었음을 암시했다.


1949년 6월 6일 중부경찰서장을 윤기병이 지휘하는 무장경찰이 특경대원을 비롯해 반민특위 요원 35명을 체포해 수감하는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무기는 물론이고 피의자를 심문한 내용이 담긴 서류 등을 모두 압수해 버렸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경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자행되었으며, 반민특위 요원들은 경찰서에 감금되어 심한 가혹행위를 받았다. 국회의장 신익희를 중심으로 다섯 명의 국회의원들이 이승만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승만으로부터 "특경대 해산은 내가 지시했다"는 말만 듣고 물러났다.


이승만은 그런 지시를 내리기 전에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필동 3가에 있는 관사에 살고 있던 김상덕의 아들 김정육의 증언이다.


"이승만이 극비리에 왔습니다. 아버님은 우리에게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당시 경호대가 우리 집에 와 있었는데 경무대 사람들이 와서 이들 대신 호위를 했어요. 이승만은 아버님과 응접실에서 담판을 했습니다. 후에 들으니 그때 아버님이 이승만의 요청에 불응했다고 하더군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주대낮에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터졌습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탕


특경대 해산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어 국회는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국회는 찬성 89표, 반대 59표로 그 요구안을 통과시켰지만, 결국 특위와 친일 경찰 측은 구속한 사람들을 서로 교환 석방하는 선에서 마무리한다는 정치적 협상을 하고 말았다. 이로써 친일 경찰은 석방되고, 반민특위는 기세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와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국회 프락치 사건이었다. 재탕, 그럿도 확대된 재탕이었다. 6월 20일부터는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약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김병회 등의 국회의원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역시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증거는 없었으며, '조작'의 냄새가 짙은 사건이었다.


노일환 등 소장파 의원 46명이 48년 10월 13일 '외국군 철수 긴급동의안'을 내놓은 것까지 문제삼았다. 아니 바로 그것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는 핵심적인 증거가 되었다.


체포된 의원들이 제헌국회에서 맹활약할 수 있었던건 그들의 전력이 전혀 문제될 게 없었으며 든든한 우익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5월 20일에 체포된 이문원은 한독당원이자 대동청년단원, 노일환은 일제 때부터 『동아일보』 기자 등으로 활약한 호남 지주 출신의 한민당원, 박윤원은 광복청년단 지방간부, 강욱중은 민족청년단원, 김병회는 독립촉성국민회원, 김약수는 한민당 간부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혹독한 구문이 가해졌지만, 증거는 없었다. 증거랍시고 제시된 건 한 여간첩의 음부에서 빼낸 문건이라는 건데 그 문건의 내용은 신문 기사 수준의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여간첩은 법정에 나타나지도 않아 그 존재조차 의문시되었으며, 이에 대해 검찰총장 권승렬은 국회에서 횡설수설했다. 모든 게 그야말로 '코미디 수준' 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9. 22:17

'대구에 분 피바람'


10월 1일 정오 대구시청 앞에서는 약 1천 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모여 쌀을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오후 2시 30분에는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에 들어간 노동자 500여 명이 경찰과 충돌하였는데, 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1명이 사망했다.


이 사망으로 인해 다음날인 10월 2일 시위대의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날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사람의 주검을 메고 시위에 참여할 만큼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는 대구경찰서를 점령해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꾸리고 시내 대부분의 파출소까지 점령해 버렸다. 


한 국제통신사는 "24시간에 걸친 피의 폭동이 일어나 38명의 경찰관이 죽고 확인할 수 없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사살당했다. 이 도시는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보도했다.


대구항쟁은 직접적으로는 식량 문제와 더불어 친일 경찰에 대한 불만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친일파 중에서도 친일 경찰이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 거의 다 자취를 감추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의 부름을 받아 전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면서 횡포를 일삼는 것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미군정은 10월 2일 오후 6시쯤에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채 전차를 앞세워 시위를 진압했다. 진압 후 대구에 도착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폭동에 가담했던 폭도들은 모조로 체포, 구송하고 주모자는 즉결처분해 버리라"고 지시했고, 이후 피바람이 불었다. 경무부 고문인 대령 매글린이 "민주경찰이 국민의 생명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장택상에게 항의할 정도였다.


대구봉기는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곧 진압되었으나 그 여파는 경남북지방의 농촌을 거쳐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대되면서 전국적인 농민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1월 상순까지 전국 90개 군 이상에서 항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예컨대, 선산 지역의 항쟁은 박상희(박정희의 형)가 10월 3일 오전 9시경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미경찰서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구미면사무소와 선산군청도 공격해 식량 130여 가마니를 탈취하였다. 박상희는 분노한 군중으로부터 경찰관을 보호함으로써 많은 인명피해가 난 경북의 다른 지역과 달리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선산 지역의 항쟁은 6일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박상희는 그 과정에서 사살당하였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