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23. 13:25

미군의 3박4일 인간 사냥


1950년 7월 26일 낮 충북 영동군 황간면 임계리와 주곡리 마을에 미군이 나타나 주민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그 미군은 제1기갑사단 제7기갑연대 제2대대 H중대(중화기 중대) 군인들이었다. 미군의 명령에 따라 500여 명의 피난민들이 4번 국도를 따라 인근 마을 노근리에 당도하였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경부선 열차의 철로로 올라섰다. 그 때 미군의 무전 연락을 받은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하였으며 지상의 군인들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철로 위에서만 최소 100여 명이 사망했다.


정구식의 중언이다.

"한 차례 폭격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 고개를 드는데 내 목덜미 위에 무엇이 얹혀 있는 것 같아 손으로 쥐어봤더니 ······, 그게 목 잘린 어린이의 머리더라고. 다시 정신을 차려 둘러보니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였고 여기저기서 사람과 소가 쓰러져 야비규환이었죠. 미군 폭격기는 약 20여 분간 폭격을 해댔어요. 나중에는 폭격기에서 기총소사도 했고요."


양해찬의 증언이다.

"나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있다가 폭격을 당했어요. 어머니가 나를 맨 밑에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내 여동생을 얹고 당신 몸으로 우리를 감쌌어요. 폭격 후 일어서니 어머니는 하복부와 발목에 파편을 맞아 피투성이고 여동생은 한쪽 눈이 피범벅이 돼 있어요.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지만 여동생 눈알이 빠져 대롱대롱 매달려 있더라구요. 동생은 눈이 아파 견딜 수 없으니까, 안 보이니까 그것이 뭣인지도 모르고 그냥 떼내 버렸어요. 어머니와 동생을 껴안고 주변을 보니 우리 집에 피난와 있다 함께 온 고종사촌 아주머니가 만삭이었는데 즉사해 있더라구요. 할머니, 형님도 거기서 돌아가셨지요."


철로 위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사람들은 철로 밑의 굴다리에 숨었다. 그러나 굴다리에 은신한 사람들을 향해서도 미군의 총질은 계속되었다. 4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피난민들은 미군의 총질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핏물을 그냥 떠마시면서 버텨야만 했다.


이게 바로 1950년 7월 26일부터 3박4일간 미군의 '인간 사냥'으로 300여 명이 죽어간 '노근리 사건' 이다.




피난민은 작전에 귀찮은 존재


왜 미군은 그런 '인간 사냥'을 했던 걸까? 먼저 이 사건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T.R. 페렌바크의 『실록 한국전쟁』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1950년 7월 20일 아침, 대전 주변 방어선이 끊임없이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농부의 흰 옷으로 변장한 수백 명의 인민군은 시중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일단 시중에 들어서면 그들은 농민의 옷을 벗어 던지고 미군에게 총격을 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처에 저격병이 깔렸다. 미군 장교들은 본부요원과 보조부대 병력을 동원해 그들의 소탕을 시도해 보았지만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어느덧 긴 하루해도 저물었다. 딘 사단장은 시내에서 철수해야 할 때가 온 것을 알았다. 딘의 지프는 길 위에 멈춰 서서 불을 뿜는 트럭들 사이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렸다. 운전병은 전속력을 냈고, 한 구역을 다 간 곳에서 교차로 하나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단의 부관 클라크 중위가 고함을 질렀다. '지나왔다!' 간신히 대전을 빠져 나온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우군 진지에 닿으려는 노력을 35일이나 거듭하다 한국인들에게 의해 인민군에게 밀고되어 포로가 되었다. 7월 20일 야간에 대전을 철수, 영동을 지키던 미 제24단의 각 부대는 7월 22일 정오, 진지를 제1기갑사단에게 인계했다. 대전에서 100여 리 떨어진 영동 방어를 미 제24가단으로부터 인수받은 미 제1기갑사단은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런 배경에 주목하여 당시 미군들이 느꼈을 극도의 공포심을 인간 사냥의 이유로 지적하는 시각이 있다. 당시 미군들의 북한군에 대한 피해의식과 두려움이 극에 달한데다 미군이 농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에 의해 습격을 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에 겁에 질려 이성을 잃은 나머지 저지른 짓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은용은 그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미군들은 노근리 앞 철로 위에다 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피난민들의 짐 검색을 실시하고, 또 폭격 후에는 철로 밑 터널 속에 그들의 위생병을 보내 부상자들을 치료까지 해주면서 피난민들이 변장한 인민군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확인했었다. 무기라고는 한 점도 갖지 않았던 피난민들, 노인과 부녀자, 유아가 절반을 훨씬 넘었던 이들로 인해서 미군들이 겁을 먹을 이유도, 이성을 잃을 까닭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많은 생각끝에 도달한 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7월 26일 미 8군사령관이 주요 지휘관에게 보낸 메시지에 주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전선을 통과하려는 피난민들의 어떤 움직임도 허용하지 말라." 그 날 10시 미 제25사단 일지에는 "사단장 킨 장군이 전투 지역에 있는 민간인들을 '적대시하고 사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노근리 사건 이후에도 피난민에 대한 무조건 사격은 많이 일어났다. 제 1기갑사단 1950년 8월 29일자 일지에는 사단장이 "모든 피난민들을 향해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돼 있다.


왜 미군 지휘부는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피난민을 작전에 방해되는 귀찮은 존재로만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노근리 학살은 워낙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범죄라 이쪽에 무게가 실린다. 단지 귀찮다고 아무런 죄도없는 민간인을 죽일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노근리 사건을 넘어서 한국전쟁 전반에 걸쳐 미군이 보인 행태와 직결되는 것이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