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19. 21:04

719명의 민간인 학살


전남 함평에서 민간인 524명을 학살하고 가옥 1천 454동을 불태웠던 11사단 예하 부대의 이른바 '견벽청야' 학살극은 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또다시 발생했다. 11사단 9연대 제3대대는 719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죽은 사람 가운데 14세 이하가 전체 사망자의 전반인 359명이었으며, 60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사망자의 10%, 그리고 나머지 40%의 사망자 중에서도 3분의 2는 부녀자들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을까? 이런 일련의 학살극은 국가의 존재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톱질전쟁'이라고 하는 전쟁의 구조상 전선이 따로 없는 가운데 빨치산 출몰 지역은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 지배하에 놓이기 마련이었다. 그런 지역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낮에는 국군에 협조하고 밤에는 빨치산에 협조하는 '이중 생활'을 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빨치산 토벌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빨치산에 협조하는 자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11사단 9연대(연대장 오익경)는 51년 2월초, 거창을 포함해 함양·산청 등 지리산 남부 지역에서 공비 소탕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이에 따라 거창의 제3대대를 중심으로 경찰과 청년의용대 등이 2월 7일 신원면에 진주하게 되었다.


빨치산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산으로 퇴각하자, 제3대대는 경찰과 청년의용대 병력을 남기고 작전 계획에 따라 신창 방면으로 이동했다. 군대가 신원면을 떠나자 빨치산은 그 날 밤 습격을 해 경찰과 교전하게 되었고, 경찰과 청년의용대 병력만으로는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 제3대대는 다시 신원면으로 진주하였다.


제3대대장 소령 한동석은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주민 1천여 명을 신원국민학교로 소집했다. 성인 남자들은 이미 피신을 한 뒤였기 때문에 모인 주민 대부분은 노약자, 부녀자, 어린아이들이었다. 한동석은 지서 주임, 사찰계 형사, 신원 면장 등으로 하여금 군인, 경찰, 공무원 및 지방유지 가족을 골라내게 한 뒤 남은 사람들을 박산 골짜기로 끌고 가서 기관총으로 집단학살한 후 휘발유를 뿌려 불태웠다. 시체더미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기도 했다 2월 10일에서 13일 사이에 저질러진 일이었다.


살해 대상자 선별 기준은 오직 한가지였다. 군인, 경찰, 공무원 및 지방유지 가족이냐 아니냐 하는 것. 그 선별의 악역을 맡은 사람 중의 하나인 <박영보 면장>을 제목으로 고은은 이런 시를 지었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이름/청야작전!/신원초등학교 교실마다 잡혀온 6백명/한 장교가/이중에 군경가족 있느냐고 물었다/몇 가족이 나왔다/사실이었다/또 몇 사람이 나왔다/사실이 아니었다/살기 위해/군경가족이라고 말했다/그때 면장 박영보가 나섰다/유들유들한 얼굴/큰 점 하나 늘어붙은 얼굴/그가/한 사람을 끌어냈다/네가 무슨 군경가족이가/또 한 사람을 끌어냈다/네가 무슨 군경가족이란 말이가/6백명 면민들 묶여갔다/비탈진 산자락/후미진 산골짝 거기 총소리 퍼부었다/그러다가/조용해졌다/······"




신성모의 사건 은폐 지시


제3대대는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시체를 휘발유로 불태우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켰을 뿐만 아니라 학살 지역을 외부와의 왕래로부터 일체 차단했다. 생존 주민들에게는 학살에 대해 발설할 경우 공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학살시 밖에 나갔다가 뒤늦게 돌아온 가족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고은의 <거창 이복남>이다.


"1951년 1월 이철수는 열네살이었습니다/할머니 유분녀/아버지 이종묵/어머니 백씨/동생 철호/머슴 박서방/식모 쌍가마 참례/이렇게 여섯이 빨갱이라는 죄로 학살당했습니다/그런데/외갓집 갔던 철수와 누이동생 복남이는 살아 남았습니다/국군은/열살짜리 복남이를 끌고 가서/손바닥에 못 박아/빨갱이라고 말하라고 협박했습니다/빨갱이 아니어요/빨갱이 아니어요/하고/마구 울부짖었습니다/그러다가/빨갱이입니다/하고 말해 버렸습니다/기절했습니다/세상은 얼어붙었습니다/하늘/푸르게/푸르게 얼어붙었습니다/오빠 철수는/세상이 무서워/국군이 무서워/산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어이할 수 없이/빨치산 소년이 되었습니다"


제3대대는 719명을 죽인 전과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은폐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대대장 한동석은 학살자의 숫자를 187명으로 줄여 공비 및 통비분자들을 소탕했다고 연대에 보고했다. 그러나 한두 명도 아니고 허공으로 사라진 532명을 어떻게 은폐할 수 있었겠는가.


이 사건은 2월 말경 피난 수도인 부산까지 소문으로 퍼졌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사건 한 달 후인 3월 12일 제11사단 자체가 육군과 국방부에 진상 보고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보고서는 "학살 주민의 대부분이 양민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이 밖에도 부녀자 강간·물품 강요·재산 약탈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미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국방부장관 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 같은 군의 비행이 외국에 알려진다면 전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군의 사기를 해친다"고 하며 사건을 은폐할 것을 지시했다. 또 그는 헌병사령관 겸 경상남도 지구 계엄사 부장이었던 김종원 대령 등을 대동하고 3월 중순경 사건 현장을 답사한 후 "보고된 희생자들 187명은 모두 통비분자 들이었다"고 발표했다.


국방부, 법무부, 내무부의 조사 결과는 제각각이었다. 학살자 수에 대해 국방부는 225명, 법무부는 275명, 내무부는 350명이라고 보고했다. 범무부장관은 김준연, 내무부장관은 조병옥이었다. 민국당 출신 조병옥과 김중연은 전쟁 발발과 동시에 거국내각의 명분으로 입각했었다.


당시 민국당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고 있었던 바, 이승만은 조병옥과 김준연이 진상 조사에 적극적이며 이 사건을 계속 거론하는 이유가 신성모는 물론 자신까지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50년대 편, 강준만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