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11. 20:04

경찰의 6·6 반민특위 습격


1949년 5월 20일, 반민특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소장파 의원인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5월 23일 열린 임시국회에서는 구속 의원의 석방결의안을 놓고 이틀간의 격론을 벌였지만 이미 국회가 크게 외축된 탓에 88 대 95로 부결되고 말았다. 국회에서 구속 의원의 석방안이 토의되고 있는 동안에 서울 시내에서는 "국회 내의 빨갱이를 추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는 관제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석방동의안이 부결된 뒤에도 찬성표를 던진 88명의 의원에게 친일세력의 공격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친일세력은 5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민중대회'라는 집회는 열고, 구속 의원의 석방결의안에 찬성한 88명의 국회의원을 공산당이라고 몰아붙였다.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는 관제데모를 주동하면서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악선전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운하와 종로서 사찰과 주임이 6월 4일 특위 특경대에 반민 피의자로 체포되었다. 마포서장은 반민특위를 방문해 이들을 선처해 달라고 했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했다. 시경 사찰과 직원들은 이승만에게 48시간 안에 반민특위의 특경대를 해산시켜 달라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


그 요구는 이승만이 자기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경찰 간부들은 실력행사를 하기로 모의하고 내무차관 장경근의 허락까지 얻어냈다. 장경근은 이승만의 사전 양해가 있었음을 암시했다.


1949년 6월 6일 중부경찰서장을 윤기병이 지휘하는 무장경찰이 특경대원을 비롯해 반민특위 요원 35명을 체포해 수감하는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무기는 물론이고 피의자를 심문한 내용이 담긴 서류 등을 모두 압수해 버렸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경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자행되었으며, 반민특위 요원들은 경찰서에 감금되어 심한 가혹행위를 받았다. 국회의장 신익희를 중심으로 다섯 명의 국회의원들이 이승만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승만으로부터 "특경대 해산은 내가 지시했다"는 말만 듣고 물러났다.


이승만은 그런 지시를 내리기 전에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필동 3가에 있는 관사에 살고 있던 김상덕의 아들 김정육의 증언이다.


"이승만이 극비리에 왔습니다. 아버님은 우리에게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당시 경호대가 우리 집에 와 있었는데 경무대 사람들이 와서 이들 대신 호위를 했어요. 이승만은 아버님과 응접실에서 담판을 했습니다. 후에 들으니 그때 아버님이 이승만의 요청에 불응했다고 하더군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주대낮에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터졌습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탕


특경대 해산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어 국회는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국회는 찬성 89표, 반대 59표로 그 요구안을 통과시켰지만, 결국 특위와 친일 경찰 측은 구속한 사람들을 서로 교환 석방하는 선에서 마무리한다는 정치적 협상을 하고 말았다. 이로써 친일 경찰은 석방되고, 반민특위는 기세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와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국회 프락치 사건이었다. 재탕, 그럿도 확대된 재탕이었다. 6월 20일부터는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약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김병회 등의 국회의원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역시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증거는 없었으며, '조작'의 냄새가 짙은 사건이었다.


노일환 등 소장파 의원 46명이 48년 10월 13일 '외국군 철수 긴급동의안'을 내놓은 것까지 문제삼았다. 아니 바로 그것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는 핵심적인 증거가 되었다.


체포된 의원들이 제헌국회에서 맹활약할 수 있었던건 그들의 전력이 전혀 문제될 게 없었으며 든든한 우익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5월 20일에 체포된 이문원은 한독당원이자 대동청년단원, 노일환은 일제 때부터 『동아일보』 기자 등으로 활약한 호남 지주 출신의 한민당원, 박윤원은 광복청년단 지방간부, 강욱중은 민족청년단원, 김병회는 독립촉성국민회원, 김약수는 한민당 간부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혹독한 구문이 가해졌지만, 증거는 없었다. 증거랍시고 제시된 건 한 여간첩의 음부에서 빼낸 문건이라는 건데 그 문건의 내용은 신문 기사 수준의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여간첩은 법정에 나타나지도 않아 그 존재조차 의문시되었으며, 이에 대해 검찰총장 권승렬은 국회에서 횡설수설했다. 모든 게 그야말로 '코미디 수준' 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0. 20:24

'농민의 보수화 시작'


10월항쟁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당시까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민위원회의 파국을 낳았다. 그러나 궁극적인 피해자는 농민이었다. 커밍스는 "봉기의 결과가 가져온 한국 빈농들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의 이익을 지켜 주었던 지방 조직들의 붕괴였다"며, "대부분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들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남한 전역에 울려 퍼졌다"라고 했다.


"좌파의 주요 기구의 전국 및 지방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든지, 투옥되었든지, 쫓기고 있든지 혹은 지하로 잠입하였다. 그들의 수많은 지지자들은 정치에서 떠나거나 더욱 급진적으로 되었다. 좌파 전체를 포용했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분쇄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적 지지를 상실한 채 보다 극단적이며 포용력이 적은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빈농들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는다는 단순한 합리성에 입각하여 묵묵히 경작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농민의 보수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이 농촌을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상처에 근거한 것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0. 19:10

'내쟁(內爭)에만 용감한 백성'


진압 후에도 대구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끊이지 않았다. 김두한의 대한민청을 비롯한 우익 청년당원들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귀속가옥에 급조한 유치장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 가두면서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경찰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2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된 10월항쟁에는 약 300만 명이 참여했는데, 경찰 200명 이상이 피살되었고, 죽은 관리, 시위자 및 민간인 수는 1천 명이 넘었다. 체포된 사람은 3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하지(존 하지, John Reed Hodge, 주한 미군 사령관 겸 미군정 사령관)는 대구항쟁시 남한을 '끓고 있는 화산', '화약 상자'로 비유했지만, 주된 원인 제공자는 미군정이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구항쟁의 배경에 대해 김삼웅은 "전평 등 좌익의 조종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해방 이후 새로운 민주사회의 건설에서 제반 개혁의 요구가 좌절된 데 대한 민중의 항거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처벌되기는커녕 당당하게 재동장하는 친일파, 토지개혁의 지연, 미소공위 결렬로 통일정부 수립 기대에 대한 좌절, 미군정의 공장 접수, 만연하는 실업난과 물가고, 귀환동포에 대한 무대책 등이 민중들에게 극심한 좌절감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이런 상황에서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일제의 공출이나 다름없는 미군적의 하곡·추곡에 대한 강제매입과 극심한 식량난이었다."


언론인 오기영은 월간 『신천지』 47년 11월호에 쓴 글에서 이 사건에 대해 "나는 일찍 만보산사건을 빌미로 일어났던 중국인 배척 사건을 평양에서 목격하고 제 살을 깎고 뼈를 저리게 하는 압박자에게는 지친 듯이 유순하던 조선 사람이 이역에 와서 날품팔이하는 고독한 중국인에게는 어이 이리 잔인한가를 통탄하였습니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그때는 그래도 만주에 있는 동포가 학대되었다는 적개심에서 폭발된 참극입니다마는 40년이나 우리의 피를 빨던 왜구는 뺨 한 개 친일 없이 주지 말라는 돈까지 몰래 주어서 고이고이 돌려보내더니 이제 골육간에 이런 피를 흘리다니 이래도 이 땅에 풍년을 주는 하늘의 은혜가 그지없이 두렵습니다. 외적에게 무력하고 내쟁(內爭)에는 용감한 백성이라고 나의 어느 선배는 말한 일이 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하여 나는 이것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9. 22:17

'대구에 분 피바람'


10월 1일 정오 대구시청 앞에서는 약 1천 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모여 쌀을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오후 2시 30분에는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에 들어간 노동자 500여 명이 경찰과 충돌하였는데, 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1명이 사망했다.


이 사망으로 인해 다음날인 10월 2일 시위대의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날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사람의 주검을 메고 시위에 참여할 만큼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는 대구경찰서를 점령해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꾸리고 시내 대부분의 파출소까지 점령해 버렸다. 


한 국제통신사는 "24시간에 걸친 피의 폭동이 일어나 38명의 경찰관이 죽고 확인할 수 없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사살당했다. 이 도시는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보도했다.


대구항쟁은 직접적으로는 식량 문제와 더불어 친일 경찰에 대한 불만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친일파 중에서도 친일 경찰이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 거의 다 자취를 감추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의 부름을 받아 전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면서 횡포를 일삼는 것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미군정은 10월 2일 오후 6시쯤에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채 전차를 앞세워 시위를 진압했다. 진압 후 대구에 도착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폭동에 가담했던 폭도들은 모조로 체포, 구송하고 주모자는 즉결처분해 버리라"고 지시했고, 이후 피바람이 불었다. 경무부 고문인 대령 매글린이 "민주경찰이 국민의 생명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장택상에게 항의할 정도였다.


대구봉기는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곧 진압되었으나 그 여파는 경남북지방의 농촌을 거쳐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대되면서 전국적인 농민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1월 상순까지 전국 90개 군 이상에서 항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예컨대, 선산 지역의 항쟁은 박상희(박정희의 형)가 10월 3일 오전 9시경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미경찰서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구미면사무소와 선산군청도 공격해 식량 130여 가마니를 탈취하였다. 박상희는 분노한 군중으로부터 경찰관을 보호함으로써 많은 인명피해가 난 경북의 다른 지역과 달리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선산 지역의 항쟁은 6일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박상희는 그 과정에서 사살당하였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9. 20:12

'해방의 선물은 기근'


1946년 10월 1일에 발생한 대구항쟁은 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몇 개월 전 대구 [영남일보]는 "쌀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썼다가 이틀간 정간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1946년 대구의 식량사정은 어떠했던가?


1945년 11월에 쌀 한 말 가격은 140원이었지만, 1946년 9월 말에는 1,500원으로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10배 이상이나 올랐다. 시민들은 쌀을 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굶주려야만 했다. 문자 그대로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초근목피(草根木皮)의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민학교 학생 중 80% 이상이 결식아동이었으며, 그로인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결석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전매청의 연초공장 노동자들은 심지어 담뱃잎을 마는 종이에 붙이는 풀까지 먹었다.


당시 전평 대구화학노조 서기 이일재의 증언이다.

"기아상태가 어느 정도 심각했느냐 하면 전매청의 연초공장에서 담배를 말아 붙이는 데 쓰는 풀이 나오면 직공들이 그 풀을 다 먹어치워 버릴 정도였어요. 풀을 먹지 못하게 검고 붉은 물감을 섞어서 내놓았지만 그것조차 몰래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지경이었어요. 그런데도 미군과 경찰은 굶주림으로 힘 없이 누워 있는 사람들을 콜레라에 감염되었다고 환자들만 격리 수용되는 곳으로 싣고 갔는데, 그러면 영락없이 죽고 마는 거지요."


1946년 4월 [영남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 그대로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세상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5월에는 콜레라마저 발생하여 대구시만 1,200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진 데다 그로 인해 외부에서의 쌀 반입도 끊기게 되었고, 6월에는 수해가 발생하여 쌀 대체작물이 큰 피해를 입은 데다 교통마저 두절되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나 몰라라 했다. 굶어죽게 된 시민들이 군정에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자, 미군정 관리는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조선에는 빵, 고기, 과일 등이 많은데 왜 쌀만 요구하느냐"고 질책하였다.


대구의 정치적 사정도 다른 지역과는 달랐다. 대구의 좌익세력은 일제하에서 어느 세력보다 더 치열하게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 왔기 때문에 시민들의 강한 신뢰를 얻어 해방 후에도 각 부문별 대중조직을 결성하여 폭넓은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 우익세력엔 친일파가 많아 대중적 기반이 매우 취약하였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9. 11:39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 이후 1000일을 맞이하였습니다.

1000일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진상규정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돌이켜 뒤돌아보면

세월호 사고날 정부는 아주 소극적 대응 또는 방치에 대한 제기가 있으며, 이를 뒷받침 하듯이 사고 이후에도 여러 정황에 대하여 은폐의혹도 있습니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을 오히려 돈을 노리고 있다고 몰아세웠으며, 언론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들에게 세월호에 대한 지루함과 무관심을 유도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보수단체들은 단식투쟁하는 세월호 시위앞에 보란듯이 폭식투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세월호 인양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세월호를 훼손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월호진상규명법은 개정안은 새누리랑의 반대로 상임위 상정이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사고에 문제제기를 하거나 진상규명에 옹호한 문화 예술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명단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304명의 세월호 희생자들과 그 가족, 살아남았지만 늘 죄책감에 시달릴 생존자들을 위해 과연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슬픔과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있습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이 세월호 사고 및 박근혜 7시간에 대한 이슈가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부디, 이번에는 꼭 진상규명이 이루어져 그에 합당한 벌과 사죄가 꼭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posted by Belle〃♬ 2017. 1. 8. 17:05

소수의 경제 전문가들은 꾸준히 부동산 거품과 가계 부채에 대해 경고를 했습니다.


과도한 대출로 인한 가계대출 비중이 커지고, 빚 갚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에 전반에 대해서도 위험해질 수 있다.

이런 논지로 몇년째 주장해오고 있지만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부동산에 대해 낙관적인 자세였습니다.


정부 정책은 점점더 소위 '빚내서 집사라'라는 무리한 정책을 사용하였고 늘 살얼음판 같은 부동산 위기는 현재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정부 관계자들은 자기가 직접적으로 '빚내서 집사라 라고 말을 한 적이 없다' 라고 합니다.

많은 정책이 '빚내서 집사라'라고 하는 것인데 말이죠.


2010년에 이미 IMF는 한국의 부동산 버블을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작년(2016년)에 IMF는 또 다시 경고를 했습니다. 

IMF에서는 집을 구입하기 위해 과한 대출을 받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특히, DTI의 규제가 가장 심각하다고 했습니다.


어쨋든 국내 소수의 경제 전문가들이나 IMF등 외국 전문가들은 한국 부동산(특히 대출과 가계부채)에 대한 우려가 있었지만,

국내 많은 경제 전문가들은 정부의 정책에 동조하듯 낙관적인 자세였습니다. 


그러나, 올해(2017년) 전망은 기존에 낙관적인 자세를 취한 전문가들도 비관하는 자세로 많이 돌아섰습니다.


주된 이유로는 작년(2016년) 11.3 부동산 정책의 여파, 미국의 금리 인상, 가계부채, 주택 공급량 증가, 국내외 경제 불확실성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저 중에 상당수는 소수의 경제 전문가들이 매년 우려했던 항목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낙관적인 자세를 취하는 전문가들도 많지만 올해는 (예단하긴 어렵지만) 확실히 몸사려야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보는 부동산 위험의 또 다른 이유는 대책없는 정부, 대선 정국 이렇게 두개를 추가하고 싶습니다.

부동산 위험을 역이용한 보수진영의 대선전략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제든, 체감이든 부동산 위험이 도래할 것이고, '부동산 위험 극복과 경제성장은 역시 보수다'라는 전략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긴 하지만 정치권은 자신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떤 정책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부동산은 가계부채와 맞물려 확실히 큰 위기는 맞습니다.

지금이라도 연착륙하며 고통을 서로 분담하면 좋겠지만,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보수진영에서 대권을 잡는다면 좀 더 무리한 정책으로 더 큰 폭탄을 만들 가능성이 커보이고,

진보진영에서 대권을 잡는다면 연착륙을 시도하겠지만 상당히 많은 반발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연착륙을 하려면 많은 부분에서 고통을 감내해야하지만 우린 아직 고통을 감내할 자세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Belle〃♬ 2016. 12. 26. 14:43

1월

정치 

 반문재인 세력 민주당 막판 탈당러쉬, 국민의당 입당

 문재인 영입 인사 줄줄이 민주당 입당

 정부의 대북 확성기 방송

 문재인 대표 사퇴, 김종인 비대위원장 체제

 사회

 소녀상 집회 막으려는 경찰

 신영복 선생 별세

 누리과정 보육대란 갈등

 1997년 이태원 살인사건 범인 20년 실형 선고

 국제

 대만 총통선거, 첫 여성지도자 차이잉원 당선



2월

 정치

 사드 배치 협의

 선거구 합의(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

 테러방지법 발의와 필리버스터

 민주당, 공천 컷오프 확정

 사회

 개성공단 폐쇄



3월

정치 

 테러방지법 통과

 새누리당 윤상현, '욕설 녹취록'과 공천 갈등

 민주당 비례대표 파동

 유승민, 새누리당 탈당

 김무성 옥새 투쟁과 김무성-친박의 야합

 사회

 두산의 4세 경영체제 출범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 (알파고4:1이세돌)

 아동학대 이슈

 진경준 검사장 넥슨 주식 의혹

 국제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이 채택

 브라질, 지카 바이러스 확산

 88년만의 미국-쿠바 정상회담




4월

 정치

 20대 총선, 16년만의 여소야대 구도 재현

 사회

 점점 심해지는 미세먼지

 '살인 가습기' 사건 은폐 의혹 

 영화인들의 부산국제영화제 참가 거부

 전경련과 어버이연합

 정운호와 최유정, 판검사 로비 사건



5월

정치

 반기문의 대선 행보

 사회

 정운호 게이트와 검찰의 전관예우

 강남역 노래방 여성 살인 사건과 여성 혐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건

 국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확정

 미국 오바마, 히로시마 방문



6월

정치

 민주당 정세균 의원, 국회의장으로 선출

 국민의당 리베이트 의혹

 'KBS 세월호 보도' 통제한 이정현 녹취록

 국제

 영국, 브렉시트 투표결과 탈퇴 찬성



7월

사회 

 한국-미국 사드 한반도 배치 결정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씨의 '국민 99%의 개, 돼지' 발언

 진경준게이트와 우병우 민정수석

 삼성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

 사드 성주 배치 결정과 주민들의 반발

 이대 미래라이프 설립추진 및 이대학생의 시위, 대규모 경찰 캠퍼스 투입



8월

사회 

 커져만 가는 우병우 비리

 리우올림픽 개최

 역대급 여름 더위와 전기 누진제 논란

 보수진영의 건국절 논란



9월

정치 

 미르, K스포츠 최순실 연루 의혹

 청와대와 미르, K스포츠 연루 의혹

사회

 경주 지진과 정부의 무기력한 대처

 백남기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과 경찰의 뻔뻔한 태도

 백남기 농민 별세

 김영란법 시행



10월

 정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JTBC의 태블릿 PC 보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대통령 1차 담화

 사회

 검찰의 우병우 비리 의혹 무혐의 처리

 서울대병원의 백남기 사망진단서 논란, 부검하려는 경찰

 삼성 갤럭시노트7 폭발사건

 최순실-차은택 및 이대 정유라 특혜 의혹

 최경희 이대총장 사퇴



11월

 정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박근혜 시술/미용 의혹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대통령 2,3차 담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사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최순실과 삼성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광화문 및 전국 촛불 시위

 국제

 미국 트럼프 공화당 후보 대선 승리



12월

 정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청문회 진행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박근혜 탄핵 가결,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 본격 행보

 새누리당 비박계 탈당 예고

 사회

 사상 최고로 퍼지는 AI 대란

 국제

 미국 금리 인상


posted by Belle〃♬ 2016. 12. 22. 20:43

역대 최고의 AI 대란으로 파장이 커지고 있는데요.


닭, 오리 등의 수요가 줄어들어 단가가 올라가고, 이에 소비자들이 돼지고기나 소고기로 옮겨가면서 돼지고기, 소고기 가격도 올랐습니다.

AI 장기화가 지속되면서 이젠 계란까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가격폭등은 물론, 품귀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겨레] 이마트도 계란 '1인 1판' 제한.. 6% 추가 인상


이렇게 기존의 수요와 가격의 불균형이 이루어지면 생산자도 소비자도 힘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틈을 노려 유통업자들의 횡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매일경제] '계란 대란'의 부끄러운 비밀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때는 이때다 싶어 한몫 차지하려는 업체들.


실제 유통업체들의 횡포는 과거 중소업체에서 대형업체로 커지는 상황입니다.

다음 기사를 보시죠.


[SBS CNBC] GS리테일, 납품업체에 '갑질'..공정위, 과징금 2억·시정명령

[경향신문] 커지는 '가정 간편식' 시장 대형 유통업 '횡포'도 커져


인터넷 검색으로 금방, 그리고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유통업의 횡포. 

이런 현상은 '대기업 프랜들리'를 내세우는 정부의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하루빨리 AI 대란이 빨리 마무리되고, 피해입은 농가의 빠른 회복과 소비자가격 또한 원래대로 돌아오길 기대합니다.

posted by Belle〃♬ 2016. 12. 2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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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일보 : ‘결정적 장면’으로 총정리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개인적으로 2번 3번 항목이 가장 크다고 본다.




참고로 한겨레기사 (9월 하순 기사) : 이것만 보면 다 안다, 최순실 게이트 총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