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7. 30. 22:57
3.군경(軍警)의 잔인한 보복극

1948년 10월 20일 정보는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인 준장 로버츠, 국방장관 이범석,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다음날 광주에 여순반란사건을 진한하기 위한 작전지도부를 세우기로 결정했고, 이튿날 여수와 순천 지역에 게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3일 간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23일 미 군사고문관의 지휘를 받아 탱크와 함포사격 등의 지원을 받아 여수와 순천에 대한 집중공격을 실시했다. 23일 순천을 장악했고 25일에는 여수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탈환했다.

순천에서부터 군경(軍警)의 잔인한 보복극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순천의 모든 성인 남자들을 순천북초등학교 교정에 감금해 놓고 엉터리 선별 심사를 통해 가려낸 사람들을 각목과 쇠사슬, 그리고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악질적'이라고 판단된 10여 명을 교정에서 총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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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붙잡혀 온 여수여고 학생들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의 차석 검사인 박찬길이 총살당한 사건은 당시 무법(無法)의 광기(狂氣)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잘 말해 준다. 경찰이 뒤집어씌운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는 조작된 것이었다. 박찬길의 즉석 총살은 그간 경찰이 검거한 좌익인사를 박찬길이 법 규정대로 처리해 빚어진 경찰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당시 경찰은 검찰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여수 진압작전은 10월 26일부터 시작되었다. 전 육군 병력의 3분의 1인 5개 연대와 7척의 해군 함정, 그리고 전 공군력에 해당하는 10대의 비행기까지 총동원되었다. 그런 여수에 대한 대대적인 봉쇄와 포격 이후 진압군이 막상 여수에 진입하고 보니 시내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반란군은 이미 24일 밤 소형 선박을 타고 탈출해 산 속으로 도주했던 것이다. 중위 김지회 등 반란군 1천여 명은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장기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남한 무장 유격전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일부 역사서엔 진압군이 26일과 27일 양일간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고 기록돼 있지만, 그건 사실과 전혀 달랐다. 이런 기록이 시사하는 건 당시 진압군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치열한 시가전'을 부각시켜야만 하는 압력을 받고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그 엄청난 병력과 장비를 동원한 대작전이 웃음거리로 전락한다면, 그건 군으로선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압군은 여수로 오는 도중에 반란군의 습격을 받아 혼비백산했었기 때문에 여수 진압작전을 전개할 때엔 "경악과 분노, 집단 히스테리 산태"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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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된 민간인들



그래서 애꿎은 민간인들이 있지도 않았던 '치열한 시가전'의 증거물로 보복의 대상이 되었다. 진압군은 여수 서국민학교에 4만 명을 집결시켜 놓고 보복 대상자를 골라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여수여중 운동장 등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현장을 목격한 한 미국 기자는 『라이프』지 48년 12월 6일자에 쓴 기사에서 "이곳에서 폭동을 진압했던 정부의 군대가 반란자들의 잔학행위와 같은 짓의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오히려 그들보다 더한 보복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라고 썼다.

"한쪽에서는 그 광경을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징벌의 장면을 말하라고 한다면, 보고 있는 아녀자들의 숨막힐 것 같은 침묵과 자신들을 잡아온 사람들 앞에 너무나도 조신하게 엎드려 있는 모습과 그들의 얼굴 피부가 옥죄어 비틀어진 것 같은 그 표정, 그리고 총살되기 위해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한마디 항변도 없이 침묵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마디의 항변도 없었다. 살려 달라는 울부짖음도 없고 슬프고 애처로운 애원의 소리도 없었다. 신의 구원을 비는 어떤 중얼거림도 다음 생을 바라는 한마디의 호소조차 없었다. 수세기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울 수조차 있었겠는가."

10월 하순 해양대 학생으로 승선 실습을 하고 있던 리영희는 여순사건의 참혹한 현장을 보게 되었다. 그는 부산에서 여수로 출동한 함정에 타게 돼 진압 후 여수여자중학교에서 목격한 장면을 이렇게 증언했다.

"운동장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즐비해 있었고, 반란군과 진압군 쌍방의 희생자들은 대부분이 젊은 민간인들이었다. 운동장 울타리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먼 발치에서 통곡하고 있었다. 나는 동료 학생들을 재촉해서 그 자리를 빨리 떠나버렸다. 멸치를 뿌려놓은 것처럼, 운동장을 덮고 있는 구부러지고 찢어진 시체들을 목격한 후회와 공포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울타리 밖에서 울부짖고 있는 남녀노소의 시선이 두려워서였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76~180쪽
posted by Belle〃♬ 2007. 7. 28. 14:12
2. 경찰과 경비대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여순사건은 그 배경에 있어서 좌익 군인들이 '숙군(肅軍) 작업'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과 아울러 경찰과 경비대가 평소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다는 점도 자리하고 있었다(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국군에 편입됐고, 9월 5일에 각기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됐지만, 9월 5일 이전의 육군은 경비대였다). 14연대 군인들은 한 달 전인 9월 14일에도 구례에서 경찰과 충돌한 적이 있었다.

당시 여수군청 직원이었던 김계유는 "우리는 흔히 식민지 경찰 운운하면서 일제 경찰을 욕했지만 그래도 일제 경찰은 법에 걸려야 단속을 했고 무고한 양민을 건드리지는 않았다"며,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의 우리 민주경찰(?)은 일제 경찰을 빰칠 정도로 강퍅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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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29일 ‘국치일’에 분열식을 하는 조선경비대. 원래 국방경비법은 남조선국방경비대가 군대로 발전하는 것을 상정하면서, 군형법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준비된 것이다.

"국민생활의 모든 면에 걸쳐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걸핏하면 생사람을 좌익으로 몰아 때려잡는 바람에 '관제 공산당'이라는 새 용어가 생겨났고,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 무조건 쩔쩔 맸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흔히 좌익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쫓기게 되면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방경비대와 경찰은 마치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충돌하기 마련이었고, 그게 커지면 총격전까지 벌이는 일이 더러 있었다."

미군정의 차별대우도 갈등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미군정은 경찰에게는 창설 때부터 새 제복과 미제 카빈 소총을 지급한 반면 경비대에게는 일본 군복과 일제 소총을 지급했다. 장택상 등 경찰 간부들이 경비대를 경시하였고 경찰관들도 경비대를 경찰예비대로 간주하여 깔보곤 했던 것도 갈등을 키웠다."

경비대왜 경찰 사이에 빚어진 충돌은 전남에서만도 이미 여러 건 있었다. 47년 6월 3일 광주 4연대가 영암경찰서를 습격했던 시건이나 1948년 10월 광주 4연대 일부 병사들이 순천경찰서를 습격했던 일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14연대도 늘 그런 조짐을 보여 왔다.

"1948년 5월 4일 신월리에 14연대가 창설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들은 술집이나 다방 같은 데서 만나도 크고 작은 시비가 늘 붙었고 심지어는 길을 가다가도 만나기만 하면 태도가 불손하다느니, 왜 째려보느냐고 생트집을 잡아 싸우기 일쑤였다. 그때 시민들은 그들이 마주치기만 해도 무슨 일이 터지지 않을까 해서 늘 조마조마해야 했다."

14연대 내부에서는 휴가 중에 경찰서를 부소고 왔다는 이야기가 자랑거리로 통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부대 내 사병들은 군인과 경찰간에 싸움이 난 것이라고 짐작했을 정도였다. 반란 주종자들이 다른 군인들을 선동할 때에 "경찰을 타도하자"고 외친 것도 바로 그런 악감정에 호소하고자 한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74~176쪽
posted by Belle〃♬ 2007. 7. 27. 14:49

1.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1948년 10월 15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는 육군 사령부로부터 19일 오후 6시를 기해 1개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은 제14연대 내의 사병들을 갈등 속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중위 김지회와 상사 지창수 등 남로당 전남도당 소속의 군인들은 월불(越北)이냐, 제주로 가는 길에 선상(船上) 반란이냐, 아니면 여수에서의 봉기냐 하는 세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였다. 결국 이들의 선택은 여수에서의 봉기였다. 이들은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는 주장을 비롯하여 남로당의 평소 선전 구호들을 외치면서 다른 군인들을 선동하여 제주 사태의 '진압군'으로 가는 대신 여수에서 '반란군'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반란군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반란을 일으킨 지 불과 네 시간 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파출소, 시청, 군청 등 치안기관과 행정기관을 장악했으며, 우익계 인사와 경찰관을 살상했다. 여수경찰서장과 사찰계 직원 10명, 한민당 여수지부장, 대동청년단 여수지구위원장, 경찰서 후원회장 등을 포함하여 우익계 인사와 그 가족 수십 명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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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신문기사

여수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반란군 2천 명은 순천으로 이동해 중위 홍순석이 지휘하는 제14연대 2개 중대 병력과 힘을 합쳐 오후에는 순천까지 수중에 넣는 데 성공했다. 반란군은 다음날인 21일에는 인근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22일에는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10월 20일 약 3만여 명의 여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민대회가 열렸고, 인민의용군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반란군은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이고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들은 제주도의 애국인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는 명령에 대해서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총궐기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인민위원회의 여수 행정기구 접수, 반동적 이승만 종속정권 처벌,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 등의 내용이 담긴 삐라를 살포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73~174쪽

posted by Belle〃♬ 2007. 7. 26. 09:53
5. '레드 헌트'의 시작

육지 응원 경찰의 대거 투입으로 1948년 7월경 경찰 병력은 2천 명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응원 경찰이 1천500명이었는데, 이들은 '제주는 빨갱이섬'이라는 인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서북청년회 등 사설단체원을 무분별하게 임시경찰로 활용하였으며, 무장대의 습격으로 인명희생을 당한 피해자 집안의 청년들을 경찰에 우선 채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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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제주도로 출동하는 토벌군을 격려하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민간인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48년 11월 중순부터 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에 발생하게 된다. 4월 3일의 무장대 습격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으며 제주도당의 독자적인 행동이었다.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의 탄압과 착취가 봉기의 발단이었다. 물론 다른 견해들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견해건, 당시 일부 신문들이 제기했던 다음과 같은 물음에 어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주민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총칼에 개의치 않고 행동으로 떨쳐 일어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원인 없이는 행동도 있을 수 없다."

제주에서 11연대의 '무차별 체포작전'이 벌어지고 있던 6월 8일 독도 근해에서 조업 중이던 11척의 어선단을 향해 9대의 미군 비행기가 고공폭격을 가해 14명의 어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론이 들끓었지만 미군은 전혀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사건 발생 지역이 폭격지구로 공포되었다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미국 『뉴욕타임스』(6월 18일자)마저 나서서 사설로 미군이 책임을 솔직히 인정하고 손해배상을 할 것을 촉구했다. 미군은 그런 여론에 밀려 배상을 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일방적으로 한 데다 비밀에 붙여 의혹과 더불어 원성을 샀다. 『조선일보』7월 9일자는 "시종일관 민중의 감정을 전연 무시하고 미안하다는 정식사과 하나 없는 당국 태도에 일반의 민족감정은 진정시킬 바를 모르게 되었"다고 했다.

미국은 오만했다. 그러나 향후 제주에서 벌어지게 될 대량 학살극에서 이루어진 미국의 배후 역할은 오만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미군정 보고서는 3.1사건 이전까지 제주 섬에서 공산주의자에 부화뇌동해 일어난 소요는 상대적으로 적었고, 경찰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이 4.3을 촉발하는 원인이 됐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4.3이 일어나자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명했다. 민중을 '사냥'해야 할 인간 이하의 '동물적 대상'으로 격하시킬 학살극의 어두운 그림자가 점점 제주를 뒤덮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13~116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7. 26. 00:19
1948년 5월 15일, 경비대 총사령부는 48년 5월 4일 수원에서 창설된 제11연대를 제주도로 이동시키면서 기존의 제9연대를 제11연대에 합편(合編)시켰다. 아울러 5월 6일 제9연대장의 자격으로 제주도에 온 중령 박진경은 5월 15일자로 제11연대장으로 변경되었다. 박진경이 연대장으로 부임한 직후인 5월 20일 경비대 병사 41명이 집단으로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제주 출신 병사들이 진압작전에서 소외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11연대 소속으로 제주 출신이었던 한 군인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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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당시 군과 경찰에 끌려간 주민들은 대부분 처형당했다.



"탈영한 군인들 중 90%가 제주 출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자 취급, 빨갱이 취급을 받았다. 제주도 놈은 다 빨갱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 출신은 모두 '모슬포 대대'라는 이름 아래 한 개의 대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탈영사건 이후 우리 모슬포 대대를 제주읍 오등리 천막 속에 분리시켜 놓고 토벌도 시키지 않았다."

제11연대는 5월 27일까지 3천여 명을 체포하였다. 박진경의 '무차별 체포작전'은 미군의 인정을 받아 박진경은 6월 1일 대령으로 진급하였지만, 6월 18일 부하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박진경 살해에 가담한 하사 손선호는 나중에 재판정에서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에 대하여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며,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고 말했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 (중략) 사격연습을 한다 하고 부락의 소(牛) 기타 가축을 난살(亂殺)하였으며 폭도의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또 매일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해아 한다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도 전연 없었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의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미군 사령부는 6월 21일 11연대장에 중령 최경록, 부연대장에 소령 송요찬을 임명하였다. 모두 일본군 준위 출신인 이들 역시 무차별 체포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는 젊은이들을 오히려 무장대 편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서울신문』48년 7월 13일자는 "600리 제주도 주변 부락에는 청년을 구경하기 어렵다. 그들은 무차별 집단 검거를 피하여 소위 인민해방군의 전위대에 몸을 던져버려야 했다"고 전하면서, 가장 큰 고통을 묻는 질문에 "호적에도 없는 아들딸 내놓으라는 데는 질색하였다"고 말하는 주민들의 한탄을 보도하였다.

경비대 총사령부는 7월 15일자로 경비대 제9연대를 부활시키면서 연대장에 기존 11연대 부연대장인 소령 송요찬을 임명하고, 최경록의 11연대는 수원으로 철수시켰다. 그리고 부산 제3여단의 2개 대대를 차출해 9연대에 배속하였다. 이러한 병력 교체의 이유는 놀랍게도 '훈련'이었다. 제주도 사태를 경비대의 야전 훈련용으로 활용한다는 게 미군정의 방침이었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11~113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7. 25. 13:47
3. "제주도 사람은 이제 다 죽었구나"

1948년 5월 5일 군정장관 윌리엄 딘은 민정장관 안재홍, 경무부장 조병옥, 경비대사령관 준장 송호성 등을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 김익렬은, 폭동은 복합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면서 경찰의 실책을 비판하였다. 김익렬이 경찰의 행동을 의심할 만한 물적 증거물과 사진첩을 제시하자, 딘은 이를 조병옥에게 추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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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병옥은 김익렬의 설명은 잘못된 것이고, 증거물과 사진첩도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김익렬을 가르키며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라고 외치면서, 김익렬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로서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주의 간부로 활약하고 있으며, 김익렬은 자기 아버지의 지령을 받아 행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익렬이 조병옥의 발언에 격분해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이자 회의는 난장판이 되었다."

안재홍은 싸움이 그치지 않자 갑자기 탁자를 두드리면서 통곡했다.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

다음날인 5월 6일 제 9연대 연대장이 중령 김익렬에서 중령 박진경으로 전격 교체되었다. 이는 미군정이 이미 제주회의 이전에 무력진압 방침을 굳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익렬이 해임 후 서울로 가서 송호성에게 제주 상황을 보고했더니 송호성은 "제주도 사람은 이제 다 죽었구나" 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제주에서의 5.10 선거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던가? 최종 선거인 등록 결과 제주도 등록률은 64.9%로 전국 평균 91.7%에 훨씬 못 미치는 전국 최하위를 기록했다. 5.10 선거에선 3개 선거구의 총 유권자 8만 5천여명 중 5만 3천여 명이 투표해 62.8%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남제주군 선거구는 86.6%의 투표율로 무소속 오용국의 당선이 확정됐지만,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각각 43% 및 46.5%의 투표율로 과반수 미달이었다. 결국 2개 선거구는 선거 무효로 처리되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10~111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7. 24. 14:39
2. 평화협상을 깬 '오라리 사건'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미 48년 2월 신촌회의에서 무장투쟁을 결정하였다. 공격 대상은 경비대나 미군이 아닌, 경찰과 우익단체였다.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독촉국민회 등 우익 청년단체 중에서도 가장 많은 원성(怨聲)을 산 서청(서북청년단)이 주요 공격 목표였다. 그리하여 유격대를 결성하였는데, 3월 28일 현재 8개 읍면에 걸쳐 모두 320명이 편성되었다. 이들이 확보한 무기는 겨우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연막탄 7발, 나머지는 죽창이었다.

경찰과 서청에 대한 도문의 분노를 잘 알고 있던 제주 주둔 경비대 제 9연대는 4월 3일의 무장대 습격사건을 도민과 경찰,서청 간의 충돌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출동에 주저하였다. 경찰은 경비대가 사태 진압에 적극 나서지 않자 경비대를 출동시키기 위해 스스로 산간마을에 불을 지른 후 무장대의 짓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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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과 관련한 정부의 공식기록 문서들이다.

경비대가 처음으로 토벌전에 나선 것은 4월 22일부터였다.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4월 28일 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다. 두 사람은 네 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다음과 같은 3개항에 합의하였다.

첫째, 72시간 내에 전투를 완전히 중지하되 산발적으로 충돌이 있으면 연락 미달로 간주하고, 5일 이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본다. 둘째,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각 전투를 재개한다. 셋째,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뤄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해준다. 또한 귀순자 수용소를 세우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한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 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 사건'이 벌어졌고, 5월 3일에는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으로써 협상이 깨지고 말았다. 이 사실을 모르고 평하협상에 따라 귀순의 성격을 띠고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자들로부터 총격을 받았다. 총격을 가한 자들은 경찰로 드러났다. 경비대의 취조 결과, 그들은 "상부의 지시에 의하여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김익렬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경찰들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도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고,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

오라리 사건에 대해선 미국이 그 배후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무엇보다도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이 미국 촬영반에 의해 공중과 땅에서 모두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놀라운 사실이지만, 더욱 놀라운 건 그 기록영화는 폭도들이 방화를 저지른 것처럼 조작 편집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08~110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7. 23. 23:04
1. 제주 인구의 10%가 죽은 대참사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훗날 긴 세월 끝에 '제주 4.3항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이 사건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 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로 비화되리라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제주 4.3항쟁은 30여만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3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희생자 수를 정확히 알기가 어려워 심지어 '8만명 희생설'까지 나왔다. 3만명이라고 해도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었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었다. 이들이 모두 골수 빨갱이라 하더라도, 어이하여 3만명이 희생될 수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아가 5.6%, 61세 이상 노인이 6.2%나 차지하고 있다는 건 어찌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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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항쟁으로 인해 희생된 제주시민의 유골들

이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이해하기 위해선 지난 1년간 일어난 일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47년 3.1사건 이후 48년 4.3발발 직전까지 1년동안 2천500명이 검속되었다. 유치장은 차고 넘쳤다. 가로 3미터 세로 3.6미터의 감방 하나에 35명이 갇혀 있어야 했다.

3.1사건 이후 지역주민과 경찰이 자주 충돌하였는데, 47년 3월 우도와 중문리 사건, 6월 종달리 사건, 8월 북촌리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47년 9월부터 우익 청년단체의 조직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회(서청) 제주 조직이 발족되었으며, 조선민족청년단 제주도 단부도 창립되었다.

48년 3월 경찰에 연행됐던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민심이 동요되었다. 죽은 청년들과 같이 수감되었던 청년들의 증언에 따르면,

"지서에서는 매질부터 시작했다. 주로 몽둥이로 때리거나 각목을 다리 사이에 끼워 위에서 밟기도 하고 물고문을 하기도 했다. 수감자들이 더욱 울분을 느꼈던 것은 경찰관들이 심심하면 한 사람씩 불러내 장난삼아 고문을 했던 일이다..... 경찰관들이 형님의 머리카락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송곳으로 불알을 찌르는 고문을 하다가 결국 불알이 상해 숨지게 됐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06~108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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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7. 18. 23:26
1947년 3월 1일 제주.

3.1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린 제주북국민학교 주위에 3만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경찰은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 100명 등 430명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행사를 마치고 난 뒤 군중은 가두시위를 했는데, 이때에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어 작은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 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던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무장을 했던 응원 경찰은 몰려오는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걸로 오해, 발포하여 6명이 숨지고 6명(제주 4.3 연구소에서는 6명 사망, 8명 중경상이라 함)이 중경상을 입었다.

힘없는 군중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발포를 하였는지.. 위협만 주었어도 흩어지는 군중들이었건만.

더욱 놀랍게 한건 병원의 검시결과 희생자 1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등 뒤에 총탄을 맞은 것으로 판명났다고 한다.

이에 민심이 들끓었고, 경찰은 그날 초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렸다(저녁 7시~다음날 오전 6시).

3월 2일부터 3.1행사위원회 간부와 중등학생들을 검속하기 시작했다. 2일 하루동안 25명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구타와 고문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게다가 경찰 책임자의 발포 정당성을 강변하는 담화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에 항의하여 3월 10일부터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이 파업에는 제주소속 경찰도 동참했다고 한다(제주경찰의 20%정도). 66명의 제주경찰관이 파면되었고, 충원은 서북청년회(함북과 황해, 평북출신의 극우청년단체로 상당수가 친일 악질자본가와 지주와 친일부역자로 이북에서 진행된 인민재판을 피해 월남한 청년들이었다.) 소속 단원들로 이루어졌다.

이것이 다음해(1948년)에 일어났던 너무나 비극적인 제주 4.3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경찰이 사과하고 수습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오히려 경찰들과 배후의 미군정은 사건을 더욱 더 키우고 말았던 것이었다.



1947년 제주 3.1 발포 주요 일지
* 3.1 - 제주민전 주최 제28주년 3·1절 기념식 개최. 응원경찰의 발포로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주민 6명 사망, 8명 중경상을 당하는 ‘3·1사건’ 발생
* 3.5 - ‘제주도 3·1사건대책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투쟁위원회’ 결성
* 3.7 -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각 읍·면위원회에 ‘3·1사건 대책 투쟁에 대하여’ 지령서 하달
* 3.8 - 3·1사건 조사를 위해 미군정청·주조선미육군사령부 합동조사단(단장 카스티어 대령) 내도
* 3.10 -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사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 돌입.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단체에서 파업에 가세
* 3.12 - 경무부 최경진 차장, 제주파업 사태 언급하면서 “원래 제주도는 주민의 90%가 좌익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발언
* 3.14 - 조병옥 경무부장, 제주도 파업진상 조사차 내도. 포고문 발표,
우도 민청원들, 우도경찰관파견소 간판을 파괴하고 소각
박경훈 제주도지사, 스타우드 제주도 군정장관에게 사직서 제출
* 3.15 - 전남경찰 122명, 전북경찰 100명 등 응원경찰 222명 제주도 도착
조병옥 경무부장, 파업주모자들을 검거하라는 명령 하달
* 3.16 - 제주경찰감찰청내에 본토 출신 경관들을 중심으로 특별수사과(과장 이호) 설치. 파업 직장의 간부급 연행하여 취조
* 3.17 - 중문지서 응원경찰대,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 발포해 주민 8명 부상
* 3.18 - 경기경찰 99명 제주도 도착. 응원경찰 총 421명으로 증가
강인수 제주경찰감찰청장, “3·1사건으로 검속된 사람은 200명 가량”이라고 발표
* 3.20 - 조병옥 경무부장, 3·1사건 진상조사 담화에서 “제1구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정당방위이며 도립병원 앞에서의 발포행위는 무사려한 행위로 인정한다”고 발표
미군정보팀, “제주의 총파업에는 좌·우익이 공히 참가하고 있으며, 제주도민 70%가 좌익단체 동조자”라고 보고
* 3.28 - 경무부, “파업선동자 전국에서 2,176명 검거, 제주는 230명”이라고 발표
* 4.1 - 조병옥 경무부장, 파업사건에 가담한 제주 경찰관 66명에 대해 징계파면했다고 발표
* 4.10 - 제주도지사에 전북출신 유해진 발령
제주경찰감찰청, 파업 검속자는 500명에 이르며 이중 260명을 군정재판에 회부했다고 발표
* 5.6 - 제주검찰청, “경찰감찰청으로부터 송치된 3·1사건 피고는 328명”이라고 발표
* 5.23 - 3·1사건 관련 재판에 회부된 328명에 대한 공판 완결. 체형 52명, 집행유예 52명, 벌금형 56명, 나머지 168명은 기소유예 및 불기소 처분

posted by Belle〃♬ 2007. 7. 16.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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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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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항복 소식에 환호하는 서울역 앞 시민들



어는 책의 저자가 던졌던 질문, 즉 '2000년대의 시각으로, 1940년대 후반 대한민국의 해방정국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에 대해 이해못할게 하나도 없다라고 필자는 생각을 했지만 1940년대 후반의 한국의 모습을 살펴보고는 점점 그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 어렵겠구나.. 라는걸 느꼈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한국사가 굉장히 뜨겁지만 그 뜨거움은 나름대로 '반공'의 안전장치 안에서 '민주'.vs.'반민주'의 구도였다고 보았을때, 1940년대 후반의 한국사는 '친공'.vs.'반공'의 구도였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반공'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어색하면서도 악(惡)스럽게 포장되어 내려왔다. 물론 지금도 '반공'이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지만 어쨋든 '반공'이란 공산주의를 가르키는 단어였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죄악스럽게 결정하는 능력도 대단하다. 우리가 쭉 그렇게 배우고 강요(?)당한 그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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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과 영국, 소련의 삼상회의에서 5년간 한국에 대하여 신탁통치 결정이 내려지자 독립을 간절히 원한 시민들이 신탁통치 반대운동(반탁)을 벌이는 모습. 처음에는 우익과 좌익 모두 반탁운동을 하였으나 좌익이 갑자기 노선을 변경하여 찬탁운동을 벌였다. 이는 우익과 좌익의 심한 대립을 초래하기도 하였는데, 이승만으로서는 상당히 반가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친공'.vs.'반공'의 대결구도보다는 '우익'.vs.'좌익'의 대결구도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오히려 그 시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익과 좌익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 우익도 강경우익과 온건우익이, 좌익도 강경좌익과 온건좌익이 존재했다.

그렇지만 혼란스런 해방정국에서 온건파는 철저히 무시당하고 억압을 당했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그러한 모습은 역사에서도 많이 봐온 터라.

그러나..
그 이데올로기가 정상적으로 발동걸렸는지도 의문이다. 1940년대 후반의 이데올로기는 원한관계나 출세의 목적, 먹고살기 위해서 본의 아니게, 자기가 신봉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활동했던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고 본다.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하여 극우익의 극치를 보여줬던 김두한이나, 돈있는 우익단체에 들어가 생계를 유지했던 사람들, 출세를 위해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눈치만 살폈던 사람들. 그것이 1940년대 후반 한국의 모습이었고 그것을 보고 우리가 이데올로기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좀 우스운 것 같다.

해방직후 어처구니 없게도 미국의 대소련에 대한 한국의 38선 제의가 먹혀들었고, 그 이후에 38선 이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친공세력이, 38선 이남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반공세력이 주름을 잡게 되었고, 이 주도세력에 역행하는 많은 부류들은 우리들이 이해하기 힘든 많은 일들을 저지르게 되었다.

권력에 굉장한 욕심을 부렸던 이승만은 당시 지주였던 친일파들과 손을 안잡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막대한 정치자금을 바탕으로 이승만은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는 점으로 보았을때, 1940년대 후반 38선 이남의 한국은 이승만 세력인가 아닌가의 대결구도 였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1940년대후반의 한국은 뭐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혼란의 시대였다고 봐야겠다.

1940년대 후반의 한국 모습은 한국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시기였고, 자신도 잘 모르는 이데올로기에 대중들이 빠져있던 시기였으며, 그로인해 엄청난 사건과 사고가 있었던.. 그렇지만 그 많은 것들이 '반공'의 틀과 우익스러움 안에서 평가되었던 아픈 시기이기도 하다.

그 시절 사건에 대하여 사실과 진실로 진술을 하여도 반공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가해지면(사실 반공에 흠집이 가해지는게 아니고, 그들[친공&극우익]의 약점에 거슬리면) 여지없이 제재가 가해졌던 시절이 많이 지난 옛이야기는 아니다. 현재까지도 그러한 모습이 남아있지 않다라고 보장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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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이 정말 말 그대로의 국가보안법인가?


"내가 무얼믿고 이야기해. 아직 다 산것도 아닌데. 그런 이야기를 뭐땀에 할라고. 왜 목숨걸고 그런 이야기를 해" 하며 면담 요청을 거부했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1990년대 중반 시절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믿을 것인가..

1940년대 후반의 한국은 왜곡된 보도와 보고가 정말 많았을 것이다. 올바른 역사를 위해서라도 위의 할머니와 같은 경험자의 입을 열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또다른 숙제라고 본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어도 아직 부족한 것이 많으니, 그 시대에 살았던 산증인들이 먼곳으로 가시기 전에 빨리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