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17. 1. 11. 20:04

경찰의 6·6 반민특위 습격


1949년 5월 20일, 반민특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소장파 의원인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 등이 체포되었다. 이들이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5월 23일 열린 임시국회에서는 구속 의원의 석방결의안을 놓고 이틀간의 격론을 벌였지만 이미 국회가 크게 외축된 탓에 88 대 95로 부결되고 말았다. 국회에서 구속 의원의 석방안이 토의되고 있는 동안에 서울 시내에서는 "국회 내의 빨갱이를 추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는 관제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석방동의안이 부결된 뒤에도 찬성표를 던진 88명의 의원에게 친일세력의 공격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친일세력은 5월 31일 파고다공원에서 '민중대회'라는 집회는 열고, 구속 의원의 석방결의안에 찬성한 88명의 국회의원을 공산당이라고 몰아붙였다.


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는 관제데모를 주동하면서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악선전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운하와 종로서 사찰과 주임이 6월 4일 특위 특경대에 반민 피의자로 체포되었다. 마포서장은 반민특위를 방문해 이들을 선처해 달라고 했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했다. 시경 사찰과 직원들은 이승만에게 48시간 안에 반민특위의 특경대를 해산시켜 달라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


그 요구는 이승만이 자기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는 확신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경찰 간부들은 실력행사를 하기로 모의하고 내무차관 장경근의 허락까지 얻어냈다. 장경근은 이승만의 사전 양해가 있었음을 암시했다.


1949년 6월 6일 중부경찰서장을 윤기병이 지휘하는 무장경찰이 특경대원을 비롯해 반민특위 요원 35명을 체포해 수감하는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무기는 물론이고 피의자를 심문한 내용이 담긴 서류 등을 모두 압수해 버렸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경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자행되었으며, 반민특위 요원들은 경찰서에 감금되어 심한 가혹행위를 받았다. 국회의장 신익희를 중심으로 다섯 명의 국회의원들이 이승만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이승만으로부터 "특경대 해산은 내가 지시했다"는 말만 듣고 물러났다.


이승만은 그런 지시를 내리기 전에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을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필동 3가에 있는 관사에 살고 있던 김상덕의 아들 김정육의 증언이다.


"이승만이 극비리에 왔습니다. 아버님은 우리에게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당시 경호대가 우리 집에 와 있었는데 경무대 사람들이 와서 이들 대신 호위를 했어요. 이승만은 아버님과 응접실에서 담판을 했습니다. 후에 들으니 그때 아버님이 이승만의 요청에 불응했다고 하더군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주대낮에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터졌습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의 재탕


특경대 해산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어 국회는 내각 총사퇴를 요구했다. 국회는 찬성 89표, 반대 59표로 그 요구안을 통과시켰지만, 결국 특위와 친일 경찰 측은 구속한 사람들을 서로 교환 석방하는 선에서 마무리한다는 정치적 협상을 하고 말았다. 이로써 친일 경찰은 석방되고, 반민특위는 기세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와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국회 프락치 사건이었다. 재탕, 그럿도 확대된 재탕이었다. 6월 20일부터는 노일환, 김옥주, 강욱중, 박윤원, 황윤호, 김약수, 서용길, 신성균, 배중혁, 김병회 등의 국회의원이 체포되었는데, 이들 역시 남로당과 연결되어 국회에서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증거는 없었으며, '조작'의 냄새가 짙은 사건이었다.


노일환 등 소장파 의원 46명이 48년 10월 13일 '외국군 철수 긴급동의안'을 내놓은 것까지 문제삼았다. 아니 바로 그것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는 핵심적인 증거가 되었다.


체포된 의원들이 제헌국회에서 맹활약할 수 있었던건 그들의 전력이 전혀 문제될 게 없었으며 든든한 우익적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5월 20일에 체포된 이문원은 한독당원이자 대동청년단원, 노일환은 일제 때부터 『동아일보』 기자 등으로 활약한 호남 지주 출신의 한민당원, 박윤원은 광복청년단 지방간부, 강욱중은 민족청년단원, 김병회는 독립촉성국민회원, 김약수는 한민당 간부였던 것이다.


이들에게 혹독한 구문이 가해졌지만, 증거는 없었다. 증거랍시고 제시된 건 한 여간첩의 음부에서 빼낸 문건이라는 건데 그 문건의 내용은 신문 기사 수준의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여간첩은 법정에 나타나지도 않아 그 존재조차 의문시되었으며, 이에 대해 검찰총장 권승렬은 국회에서 횡설수설했다. 모든 게 그야말로 '코미디 수준' 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0. 20:24

'농민의 보수화 시작'


10월항쟁은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며, 당시까지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인민위원회의 파국을 낳았다. 그러나 궁극적인 피해자는 농민이었다. 커밍스는 "봉기의 결과가 가져온 한국 빈농들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의 이익을 지켜 주었던 지방 조직들의 붕괴였다"며, "대부분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들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남한 전역에 울려 퍼졌다"라고 했다.


"좌파의 주요 기구의 전국 및 지방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든지, 투옥되었든지, 쫓기고 있든지 혹은 지하로 잠입하였다. 그들의 수많은 지지자들은 정치에서 떠나거나 더욱 급진적으로 되었다. 좌파 전체를 포용했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분쇄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대중적 지지를 상실한 채 보다 극단적이며 포용력이 적은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빈농들은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는다는 단순한 합리성에 입각하여 묵묵히 경작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부터 농민의 보수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이 농촌을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역사적 상처에 근거한 것이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10. 19:10

'내쟁(內爭)에만 용감한 백성'


진압 후에도 대구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끊이지 않았다. 김두한의 대한민청을 비롯한 우익 청년당원들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귀속가옥에 급조한 유치장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 가두면서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경찰보다 더 무서운 존재"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2월까지 전국으로 확대된 10월항쟁에는 약 300만 명이 참여했는데, 경찰 200명 이상이 피살되었고, 죽은 관리, 시위자 및 민간인 수는 1천 명이 넘었다. 체포된 사람은 3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하지(존 하지, John Reed Hodge, 주한 미군 사령관 겸 미군정 사령관)는 대구항쟁시 남한을 '끓고 있는 화산', '화약 상자'로 비유했지만, 주된 원인 제공자는 미군정이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구항쟁의 배경에 대해 김삼웅은 "전평 등 좌익의 조종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해방 이후 새로운 민주사회의 건설에서 제반 개혁의 요구가 좌절된 데 대한 민중의 항거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처벌되기는커녕 당당하게 재동장하는 친일파, 토지개혁의 지연, 미소공위 결렬로 통일정부 수립 기대에 대한 좌절, 미군정의 공장 접수, 만연하는 실업난과 물가고, 귀환동포에 대한 무대책 등이 민중들에게 극심한 좌절감과 분노를 안겨주었고, 이런 상황에서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일제의 공출이나 다름없는 미군적의 하곡·추곡에 대한 강제매입과 극심한 식량난이었다."


언론인 오기영은 월간 『신천지』 47년 11월호에 쓴 글에서 이 사건에 대해 "나는 일찍 만보산사건을 빌미로 일어났던 중국인 배척 사건을 평양에서 목격하고 제 살을 깎고 뼈를 저리게 하는 압박자에게는 지친 듯이 유순하던 조선 사람이 이역에 와서 날품팔이하는 고독한 중국인에게는 어이 이리 잔인한가를 통탄하였습니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그때는 그래도 만주에 있는 동포가 학대되었다는 적개심에서 폭발된 참극입니다마는 40년이나 우리의 피를 빨던 왜구는 뺨 한 개 친일 없이 주지 말라는 돈까지 몰래 주어서 고이고이 돌려보내더니 이제 골육간에 이런 피를 흘리다니 이래도 이 땅에 풍년을 주는 하늘의 은혜가 그지없이 두렵습니다. 외적에게 무력하고 내쟁(內爭)에는 용감한 백성이라고 나의 어느 선배는 말한 일이 있는데 이번 사건을 통하여 나는 이것을 통감하는 바입니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9. 22:17

'대구에 분 피바람'


10월 1일 정오 대구시청 앞에서는 약 1천 명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모여 쌀을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오후 2시 30분에는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에 들어간 노동자 500여 명이 경찰과 충돌하였는데, 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가운데 1명이 사망했다.


이 사망으로 인해 다음날인 10월 2일 시위대의 숫자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날 경찰의 발포로 사망한 사람의 주검을 메고 시위에 참여할 만큼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는 대구경찰서를 점령해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꾸리고 시내 대부분의 파출소까지 점령해 버렸다. 


한 국제통신사는 "24시간에 걸친 피의 폭동이 일어나 38명의 경찰관이 죽고 확인할 수 없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사살당했다. 이 도시는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보도했다.


대구항쟁은 직접적으로는 식량 문제와 더불어 친일 경찰에 대한 불만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친일파 중에서도 친일 경찰이 가장 심한 증오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 거의 다 자취를 감추었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의 부름을 받아 전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면서 횡포를 일삼는 것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던 것이다.


미군정은 10월 2일 오후 6시쯤에 대구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채 전차를 앞세워 시위를 진압했다. 진압 후 대구에 도착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폭동에 가담했던 폭도들은 모조로 체포, 구송하고 주모자는 즉결처분해 버리라"고 지시했고, 이후 피바람이 불었다. 경무부 고문인 대령 매글린이 "민주경찰이 국민의 생명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어럴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장택상에게 항의할 정도였다.


대구봉기는 미군정과 경찰에 의해 곧 진압되었으나 그 여파는 경남북지방의 농촌을 거쳐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대되면서 전국적인 농민봉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11월 상순까지 전국 90개 군 이상에서 항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예컨대, 선산 지역의 항쟁은 박상희(박정희의 형)가 10월 3일 오전 9시경 2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미경찰서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구미면사무소와 선산군청도 공격해 식량 130여 가마니를 탈취하였다. 박상희는 분노한 군중으로부터 경찰관을 보호함으로써 많은 인명피해가 난 경북의 다른 지역과 달리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선산 지역의 항쟁은 6일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박상희는 그 과정에서 사살당하였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17. 1. 9. 20:12

'해방의 선물은 기근'


1946년 10월 1일에 발생한 대구항쟁은 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몇 개월 전 대구 [영남일보]는 "쌀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썼다가 이틀간 정간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1946년 대구의 식량사정은 어떠했던가?


1945년 11월에 쌀 한 말 가격은 140원이었지만, 1946년 9월 말에는 1,500원으로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10배 이상이나 올랐다. 시민들은 쌀을 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굶주려야만 했다. 문자 그대로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초근목피(草根木皮)의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민학교 학생 중 80% 이상이 결식아동이었으며, 그로인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결석하는 학생들이 속출했다. 전매청의 연초공장 노동자들은 심지어 담뱃잎을 마는 종이에 붙이는 풀까지 먹었다.


당시 전평 대구화학노조 서기 이일재의 증언이다.

"기아상태가 어느 정도 심각했느냐 하면 전매청의 연초공장에서 담배를 말아 붙이는 데 쓰는 풀이 나오면 직공들이 그 풀을 다 먹어치워 버릴 정도였어요. 풀을 먹지 못하게 검고 붉은 물감을 섞어서 내놓았지만 그것조차 몰래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지경이었어요. 그런데도 미군과 경찰은 굶주림으로 힘 없이 누워 있는 사람들을 콜레라에 감염되었다고 환자들만 격리 수용되는 곳으로 싣고 갔는데, 그러면 영락없이 죽고 마는 거지요."


1946년 4월 [영남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 그대로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세상이었다. 설상가상이었다. 5월에는 콜레라마저 발생하여 대구시만 1,200여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빚어진 데다 그로 인해 외부에서의 쌀 반입도 끊기게 되었고, 6월에는 수해가 발생하여 쌀 대체작물이 큰 피해를 입은 데다 교통마저 두절되어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나 몰라라 했다. 굶어죽게 된 시민들이 군정에 식량배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자, 미군정 관리는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조선에는 빵, 고기, 과일 등이 많은데 왜 쌀만 요구하느냐"고 질책하였다.


대구의 정치적 사정도 다른 지역과는 달랐다. 대구의 좌익세력은 일제하에서 어느 세력보다 더 치열하게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 왔기 때문에 시민들의 강한 신뢰를 얻어 해방 후에도 각 부문별 대중조직을 결성하여 폭넓은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 우익세력엔 친일파가 많아 대중적 기반이 매우 취약하였다.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posted by Belle〃♬ 2007. 9. 27. 20:10
마지막. 노무현 대통령 발표문

제주4·3사건에 대한 대통령 발표문
존경하는 도민과 유족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

55년 전, 평화로운 이곳 제주도에서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중의 하나인 4·3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국제적인 냉전과 민족 분단이 몰고 온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손실을 입었습니다.저는 이번 제주방문 전에 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에 의거해 각계 인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2년여의 조사를 통해 의결한 결과를 보고 받았습니다.위원회는 이 사건으로 무고한 희생이 발생된 데 대한 정부의 사과와 희생자 명예회복, 그리고 추모사업의 적극적인 추진을 건의해왔습니다. 저는 이제야말로 해방 직후 정부 수립과정에서 발생했던 이 불행한 사건의 역사적 매듭을 짓고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제주도에서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그리고 1954년 9월 21일까지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희생됐습니다.저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목을 빕니다.정부는 4·3평화공원 조성, 신속한 명예회복 등 위원회의 건의사항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과거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은 비단 그 희생자와 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분들의 충정을 소중히 여기는 동시에, 역사의 진실을 밝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여 보다 밝은 미래를 기약하자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4·3사건의 소중한 교훈을 더욱 승화시킴으로써 ‘평화와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확산시켜야 하겠습니다. 화해와 협력으로 이 땅에서 모든 대립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서 동북아와 세계화의 길을 열어나가야 하겠습니다.제주도민 여러분께서는 폐허를 딛고 맨 손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평화의 섬 제주를 재건해 냈습니다. 제주도민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이제 제주도는 인권의 상징이자 평화의 섬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전국민과 함께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3. 10. 31
대통령 노 무 현





제주4·3사건 희생자 위령제 추도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주도민과 4·3 유가족 여러분,
우리는 오늘, 58년 전 분단과 냉전이 불러온 불행한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모였습니다. 저는 먼저,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오랜 세월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디어 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무력충돌과 진압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 되었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제주도민과 유가족 여러분,
2년 반 전, 저는 4·3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여러분께 사과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내주신 박수와 눈물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정부는 그동안 희생자 명예회복과 추모사업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지난달에도 2,800여명을 4·3 희생자로 추가 인정했고, 이곳 4·3평화공원 조성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유해와 유적지를 발굴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지원해 나갈 것입니다.이제 4·3사건위원회가 건의한 정부의 사과와 명예회복, 추모사업 등은 나름대로 상당한 진전이 이뤄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국민적인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가능한 일 하나하나를 점진적으로 풀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앞으로도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4·3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무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랬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확보되고, 그 위에서 우리 국민들이 함께 상생하고 통합할 수 있을 것입니다.아직도 과거사 정리 작업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의 걸림돌을 지금껏 넘어서지 못했던 것입니다.누구를 벌하고, 무엇을 빼앗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억울한 누명과 맺힌 한을 풀어주고,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다짐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통해 우리 국민이 하나가 되는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하나하나 매듭지어갈 때, 그 매듭은 미래를 향해 내딛는 새로운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보배입니다.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인이 사랑하는 평화의 섬, 번영의 섬으로 힘차게 도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주도가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도민 여러분은 폐허를 딛고 아름다운 섬을 재건해냈고, 어느 지역보다 높은 자치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민 스스로 결의해서 항상 중앙정부가 기대하는 이상의 높은 성과를 이루어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앞장서 나아가는 만큼 정부도 열심히 성원하고 힘껏 밀어드리겠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풍요롭고 활력 넘치는 제주를 만들어 나갑시다. 이 평화의 섬을 통해 한국과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합시다. 다시 한번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행사를 지켜보면서 그 엄청난 고통과 분노가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켜 볼 수 있는 역사가 되고, 그 역사의 마당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보면서 앞으로 또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 이것이 제주도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 국민들에게 이제 분노와 불신과 증오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화해를 가르쳐주는 중요한 상징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함께 노력해 나갑시다. 감사합니다.

2006. 4. 3
대통령 노 무 현





사람들이 광주 민주화 항쟁만을 기억해주지 않길 바라며 연재를 마칩니다.
posted by Belle〃♬ 2007. 9. 27. 19:56
15. 공포는 아직 남아 있다.

연좌제의 고통도 심했다. 한 4.3 수형자의 증언이다.

"(내 옥살이 때문에) 친족간에도 미안한게 있어. 내가 그런 걸로 징역을 사니까 친족이 뭘 하나 하려고 해도 나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거라. 취직을 하려고 해도, (나 때문에) 그런 것도 못한 사람이 있어. 그런 거 보면 많이 미안하기도 하지. 사람이 징역을 살고 나왔으면, 그걸로 그만해야 하는데. 아이고, 징역 살고 오니까 그때부터 경찰이 출입했어. 집에 있으면 통지가 와. 서귀포경찰서에서. 조금 들어볼 말이 있으니까 와달라고 해. 가면 들어볼 말 개뿔도 없으면서 말야. 들어볼 말도 생전 없으면서 가면 '뭐하면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 '어디 다니느갸?' 이거라. 일년에 서너 차례씩은 했어. 노태우 시절까지도 그랬어."

모든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감시와 추궁도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그래서 아예 사람이 있는 곳은 피해 버리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 가면 경찰에서 뒷조사를 하는 등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97년에도 '기억의 타살'은 끝나지 않았다. 김종민은 "마을의 온갖 사건들을 증언하던 한 노인은 정작 자신의 어머니가 희생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취재반이 다른 곳에서 그 사실을 알고 다시 확인하면 그제서야 실토를 했다"고 말했다.

"제주도의회 4.3특위가 희생자 조사를 벌일 때도 많은 유족들은 신고를 기피했다. 농민들보다는 공무원이나 사업가 등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일수록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이 겪었던 연좌제 피해 사례를 이야기하며 '자식에게만큼은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하면서, 연좌제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했다. 대부분의 유족들은 자기 부모가 배운 것 없는 촌로였음을 강조했다. 사상범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극단적인 반공이데올로기가 낳은 현상이다. 그리고 일부는 부모를 총살한 토벌대보다 '사태를 유발시킨' 무장대를 원망했다. 심지어 위령제 때 무장대로 추정되는 사람의 위패가 보인다면서 자기 부모의 위패를 거두어 가기도 했다. ...... 최근에도(97년 3월) 취재반은 증언 채록에 애를 먹었는데, 바로 '황장엽 리스트'가 연일 언론에 보도될 때였다. '세상이 다시 어지러워지면 내가 한 증언이 문제될 게 아니냐'는 걱정 때문이었다."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위원회(위원장 총리 고건)가 확정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유혈사태를 초래한 초토화작전 및 집단 인명피해(집단학살)의 최종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다고 지적했으며, 10월 31일 대통령 노무현은 사건 발생 55년 만에 당시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2006년 4월 3일, 58돌을 맞은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국가 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참석한 대통령 노무현은 추도사를 통해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됐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며, "오랜 세월 말로 다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뎌온 유가족들께 진심으로 위로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유족회 회장 김두연은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58년 만에 대통령이 직접 위령제 행사에 참석해 도민들에게 사과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라면서, "유족들의 한이 풀렸다"며 감격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12~214쪽 그대로 인용

참고사이트
제주 4.3 연구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9. 19. 18:02
14. 날조된 딱지와의 투쟁, 기억의 타살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뜻이 어떠했건, 그들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축하는 그 순간에도 제주 도민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제주도민들은 이승만 정권이 덧씌운 '빨갱이 섬' 이라는 날조된 딱지와의 투쟁을 전개해야 했다.

한수영이 지적했듯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 출신 청년들이 해병대에 무더기로 자원입대해 '귀신잡는 해병' 이라는 별명을 낳게 만든 것도 '빨갱이 섬' 혹은 '잠재적인 좌익분자들의 소굴' 이라는 바깥의 인상을 어떤 방법으로든 허물고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싶었던 제주 사람들의 생존의지 때문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학살극이 완료된 이후에도 제주도민들의 고통과 공포는 끝나지 않았다. 현기영은 "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5만 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했다.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30년 동안 단 한번도 고발되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 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 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 해서 30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 봐 두려웠다."

또 현기영은 "역대 독재정권들은 공포정치를 통하여 4.3을 금기의 영역에 묶어놓고, 그 사건에 대한 도민의 집단적 기억을 폭력적으로 말살하려고 했었다"며, "비참한 사건에 대한 도민의 집단적 기억을 말살하는 정치를 '망각의 정치'라고 한다"고 했다.

"이러한 기억의 타살행위는 반세기 동안 도민의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도민들은 그 참혹한 경험을 망각하지 않고는 도무지 살 수 없어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기억을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간의 내통이 철저히 봉쇄되고 말았으니, 살아남은 자 역시 살아 있되 기억이 타살당한 죽은 자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제민일보』 기자 김종민이 1988년 봄 생존자의 증언 채록에 나섰을때의 경험담이다.

"일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취재반을 문 앞에서 쫓아냈다. 어쩌다 할아버지가 증언을 할라치면 어느새 부엌에서 나온 할머니가 막았다. '이 하르방 또 잡혀 가려고 실없는 소리를 한다' 고. ...... 반발심도 '적당하게' 당해야 생기는 걸까. 체험자들은 철저하게 좌절해 패배주의에 빠져있었고 큰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모가 죽을 때 박수를 치고 만세를 불러야 했던 유족들은 진상규명 의지는커녕 '4.3'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꺼렸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10~212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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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9. 19. 17:42
13. 4.3의 배후엔 미국이 있었다.

48년 5.10선거에서 꼭 1년이 지난 49년 5월 10일 제주도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49년 5.10재선거를 치르고 돌아온 경찰대에게 국무총리 이범석은 환영사에서 "제주도의 완전 진압은 비단 대한민국에 대한 큰 충성일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공산주의 독재로부터 방어하는 데 큰 공적이 있는 것"이라고 치하했다.

『조선중앙일보』 49년 9월 1일자는 "외국 기자들은 이 사태를 가리켜 가장 흥미롭기나 한 듯이 '마셜'과 '몰로토프'의 시험장이니, 미소 각축장이니, 38선의 축쇄판이니 하고 이곳 제주도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을 붓끝으로만 이리 왈 저리 왈 한 사실도 있었다"면서, 제주도는 "극동의 반공보루로써 새로운 시험장이 되어져 있는 것"이라고 썼다.

미국은 제주에서의 '인간 사냥'에 어느 정도 개입했던 것일까? 훗날 4.3 진압을 미군 장교가 직접 지휘했다는 미국 측 인사들의 증언도 나왔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진상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국이 '인간 사냥'을 방조 내지 부추켰다는 점이다. 미국은 왜 그랬을까?

그 이유에 대해 박명림은 '상황론'과 '음모론'을 제시했다. 상황론은 "철수에 앞서 친미반공 기지를 구축한다는 미군의 점령 목표가 여순사건으로 인해 차질을 빚었고, 제주도 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에 위기를 느낀 나머지 전율할 학살극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음로론은 "미군은 대공투쟁의 전초 기지로써 제주도에서 '고도로 의도된 실험'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제주도의 군사적 기지로써의 가치에도 주목했으리라는 시각도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말기는 45년에 약 7만명의 병력을 제주도내에 주둔시켰다는 것, 46년 10월 AP통신이 제주도를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지브롤터에 비유했던 것, 47년 이승만의 제주도 미군기지 제공방언, 49년 대만 총통 장개석의 공군기지 설치 제안, 49년 10월 주한 미대사관 보고서에서 "전략상 엄청난 가치를 지닌 제주도"라고 거론한 점이 바로 제주도의 그런 군사전략적인 가치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미군의 제주항쟁에 대해 초토작전을 강핸한 건 본국 정부의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미국은 당시 유엔에서 겪고 있던 곤경, 즉 한반도 문제 해결을 둘러싼 소련의 비난을 의식했다. 소련은 "미군정의 폭정에 대항해 주민들이 각지에서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 좋은 예가 제주도 폭동사건"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관계자를 문책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폭도를 진압하라는 명령까지 하달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유엔의 한국정부 승인을 앞두고 정통성 문제로 번질까 봐 초강경 대응을 원했으니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8~210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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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9. 13. 17:57
12.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는다"

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주 4.3 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지시했다. 이승만을 총재로 모시고 있는 대한청년단은 이승만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김계순은 "4.3 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 온 한 처녀가 하귀 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사라진 오라버니를 찾아내라는 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대가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지만 며칠 후 결국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라고 증언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한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들 한 번씩 찌르라고 했습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내 차례가 되기 전에 그 처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경찰은 시신을 이리저리 굴려보다가 죽음을 확인하고는 남자들에게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밥도 못 먹고 난리가 났어요. 또한 그 일로 몹시 앓았습니다. 사촌언니는 그때 찔렀다면서 그 후 막 아파서 죽다 살아났다는 겁니다.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들 나처럼 앓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앓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니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 안 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몸을 줬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7~208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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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