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Belle〃♬ 2007. 9. 13. 17:47
11. 현기영의 『순이 삼촌』

현기영의 『순이 삼촌』에 기록된 내용도 눈물겹다.

"작전명령에 의해 소탕된 것은 거개가 노인과 아녀자들이었다. 그러니 군경 쪽에서 찾던 소위 도피자들도 못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다니! 또 도피 생활을 하느라고 마침 마을을 떠나 있어서 화를 면햇던 남정네들이 군경을 피해 다녔으니까 도피자가 틀림없겠지만 그들도 공비는 아니었다. 사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공비에게도 쫓기고 군경에게도 쫓겨 할 수 없이 이리저리 피해 도망다니는 도피자일 따름이었다."

"이렇게 안팎으로 혹독하게 부대낀 마을 남정들 중에는 아버지처럼 여러 달 전에 밤중에 통통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해 버린 사람도 잇고 육지 전라도 땅으로 피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사내아이들을 다른 마을로 보내기도 했다. 그것도 큰놈은 읍내 이모네 집에, 샛놈(가운데 아들)은 함덕 외삼촌한테, 막내놈은 또 어디에 하는 식으로 사방에 뿔뿔이 흩어놓았다. 그건 아마도 한군데 모여 있다가 몰살되어 씨멸족하면 종자 하나 추리지 못할까봐 생각해낸 궁리였으리라."

"내 아래 또래의 아이들에게 몰래 양과자를 주어 아버니자 형이 숨은 곳을 가리켜 달라고 꾀어내던 서청 출신의 순경들, 철모르는 아이들은 대밭에서, 마루 밑에서, 외양간 밑이나 조짚가리 밑에 판 굴에서 여러번 제 아버지와 형을 가리켜냈다.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 살 노인을 닦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한다고 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꿇고 앉은 채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닭 잡아 내라고 공포를 빵빵 쏘아대기도 했다."

"그들은 또 여맹(女盟)이 뭣 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 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에 가입했다는 협의를 뒤집어씌우고 발가벗겨 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 지서에 붙을어다놓고 남편의 행방을 대라는 닦달 끝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건 간밤에 남편이 왔다갔는지 알아본다는 핑계였는데, 남편이 왔다갔으면 분명 그 짓을 했을 것이고, 아직 거기엔 분명 그 흔적이 남아 있을 테니 들여다보자는 것이었다. ...... 거기다가 이들을 밭에서 혼자 김매는 젊은 여자만 보면 무조건 냅다 덮친다는 소문이었으니 나이 찬 딸을 둔 집에서는 이래저래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 딸이 겁탈당하기를 기다리느니 미리 선수를 쳐서 서청 출신 군인에게 시집보낸 우리 할아버지의 처사는 백번 잘한 일이었다. 아직 스무 살 어린 나이에 별 분수를 모르던 고모부는 할아버지가 꾀로 얼르는 바람에 얼떨결에 결혼하고 만 것이었는데 고모는 고모부보다 두 살이 더 많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5~207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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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9. 3. 13:24
10. 사살연습이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

49년 1월 17일에 벌어진 북촌리 학살사건도 끔찍했다. 제2연대 3대대 중대 일부 병력이 북촌리를 통과하다가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으로 230~300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300여채의 가옥을 잿더미로 만든 사건이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1쳔여 명의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교단에 오른 현장 지휘자는 먼저 민보단 책임자를 나오도록 해서 '마을 보초를 잘못 섰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즉결처분했다. 주민들이 동요하자 위협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 위협사격으로 30대 임산부와 두 살짜리 젖먹이를 안은 40대 여인들이 쓰러졌다. 많은 마을 주민들은 젖먹이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숨진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들어 젖을 빨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전한다. 군인들은 다시 군경 가족을 나오도록 해서 운동장 서쪽 편으로 따로 분리시켰다.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주민들 가운데는 군경 가족이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이 '사는 길'이라 여겨 필사적으로 달려나가다 개머리판으로 얻어터지거나 총상을 입기도 했다. 어린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빨갱이 가족'을 찾아내라고 들볶던 군인들은 이 일이 여의치 않자 주민 몇십 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밭에서 사살하기 시작했다."

당시 2연대 3대대의 대대장 차량을 운전했던 김병석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대대장 차량은 임시로 앰뷸런스를 사용하고 있었어. 날씨가 추워서 나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고 6, 7명의 장교들이 앰뷸런스 뒤에서 참모회의를 가졌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했어. '학교 담 위에 대대 병력을 모아놓고 기총사살을 해야 한다', '대대 화기인 박격포를 이용해야 한다' 등 의견이 분분했지. 그때 한 장교가 '군대 들어와서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는 군인이 태반이다. 분대별로 길 건너 옴팡밭(길 아래쪽에 푹 꺼진 밭)으로 끌고 가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어. 모두 좋다고 했지. 동쪽 줄부터 끌고 가기 시작했어. 그때는 나도 혼이 다 나갔던 것 같애. 고향이 함덕리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는 인척관계도 있을 거고 동창들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아무 생각도 안났어."

60년 4.19 후 『조선일보』 60년 12월 22일자가 이 사건을 기사화했다. 이 기사는 <끔찍한 악몽, 과부(寡婦)의 마을...... 해마다 이맘 땐 집단제사> 라는 제목 아래 "남녀 유권자 비율을 따져보면 거의 3대 1에 가까울 만큼 남자들이 희소한 곳"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5.16쿠데타로 진상은 다시 파묻히고 말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4~205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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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lle〃♬ 2007. 8. 31. 02:28
9. '함정 토벌' '대살(代殺)' '이름 빼앗기지 마라'

집단 학살이 가장 극심했던 48년 12월 중순부터 약 열흘간 토벌대는 전과(戰果)를 입증받아 승진하기 위해 입산한 사람들을 총살한 후 목을 잘라 오기도 했다.

'함정 토벌' 또는 '자주 사건'도 있었다.

"토벌대는 무장대처럼 낡은 옷으로 변장해 민가에 들어가 '산에서 왔다'며 식량을 요구하거나 숨겨줄 것을 애원했다. 측은하게 여겨 밥을 주는 사람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낸 토벌대에게 총살되었다. 또한 여기저기서 소위 '자주 강연'이 열렸다. 토벌대는 주민에게 '과거에 조금이라도 산에 협조한 사실이 있으면 자수해 편히 살라'고 했다. 이미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거나 자수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협박이 뒤따랐다. 사태 초기 무장대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을때 주민들 어느 누구도 무장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옷가지를 올렸고 쌀 한 되 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나 둘 자수자가 나오자 토벌대는 이들을 집단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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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원 화집 "동백꽃 지다" 중 '공격-탄압이면 항쟁이다'



'대살(代殺)' 이라는 것도 있었다. 가족 중 청년이 사라진 집안의 사람들은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하는 것이다. 48년 12월 13일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 주민 48명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이 마을에서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총살극을 구경시켰다 하여 이 사건을 '관광총살' 이라고도 부른다.

'이름 빼앗기지 마라'는 유행어도 나돌았다. 토벌대의 고문이 워낙 가혹해 일단 취조를 받으면 허위로라도 자백해야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원면 신례리 양경수 씨(78)는 당시 '이름 빼앗기지 마라'는 유행어가 있었다고 말했다. 우연히 토벌대에게 끌려가는 사람의 앞에 가거나 근처에 있다가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의 존재를 남기지 말라는 뜻이다. '매에는 장사가 없어 고문을 받으면 아무 이름이나 튀어나오는 법' 이라고 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2~204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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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lle〃♬ 2007. 8. 26. 12:14
8. 토벌대의 집단 광기

초토화 작전 기간 중에서도 48년 12월 중순부터 약 열흘간 집단학살이 가장 극심했다. 김종민은 "이 시기 토벌대의 행태는 마치 총살시킬 '머리수'를 채우기 위해 광분한 듯 보인다"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와 관련, 한 미군 보고서는 9연대의 작전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그 이유를 '수준 높은 작전을 펼치려는 욕망과 2연대 성공자들의 훌륭한 업적 기록에 부응하려는 욕망 때문' 이라고 분석했다(『G-2 보고서』, 1948. 12. 17). 당시 제주 주둔 9연대는 12월 말로 2연대와 교체하기로 되어 있었다.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에 앞서 '마지막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여순사건 진압을 완수했던 2연대의 성과에 맞서기 위해 '전과' 올리기에 열을 냈다는 분석이다."

12월 말 제주 주둔 토벌대가 9연대(연대장 송요찬)에서 2연대(연대장 함병선)로 교체되면서 서청도 더욱 기승을 부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 광기'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완전한 언론통제 때문이었다.

열세 살 소년을 고문해서 죽게 만든 사건의 48년 9월 15일자 중앙 신문들에 보도된 이후 언론마저 토벌대의 토벌 대상이 되었다. 48년 10월 『경향신문』 제주지사장 현인하와 『서울신문』 제주지사장 이상희가 끌려가 처형당했으며,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 사정과 전무가 끌려갔고 편집국장은 총살되었는데, 누가 감히 목숨 걸고 제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밖에 상세히 알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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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4.3사건지원사업소가 발굴한 4.3사건 당시 희생자 유해 3구



사실 '집단 광기'의 조짐은 사태 초기부터 있었다. 김종민에 따르면, "처음엔 '말 태우기'와 '뺨 때리기'가 유행했다. 토벌대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그 위에 태워 빙빙돌게 했다. 또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머뭇거리거나 살살 때리면 무자비한 구타가 가해졌다. 심지어는 총살에 앞서 총살자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자기 부모형제가 총에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표선면 가시리 안공림 씨(58)는 여덟살 때 총살장에서 박수를 쳤던 끔찍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너무도 끔찍해 눈을 뜰 수도 없었지만 벌벌 떨며 박수를 쳐야 했다'고 했다...... 미친 짓거리는 점점 심해져 갔다. 연행자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녀 모두 옷을 벗긴 후 강제로 성행위를 시키다 총살한 일도 있었다.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뺨 때리게 하기'는 오라리 방화사건 때 벌어진 일이었는데, 고은은 <오라리>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제주도 토벌대원 셋이 한동안 심심했다 / 담배꽁초를 던졌다 / 침 뱉었다 / 오라리 마을 / 잡힌 노인 임차순 옹을 불러냈다 영감 나와 / 손자 임경표를 불러냈다 너 나와 / 할아버지 때귀 갈겨봐 / 손자는 불응했다 / 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 경표야 날 때려라 어서 때려라 / 손자가 할아버지 따귀를 때렸다 / 세게 때려 이 새끼야/토벌대가 아이를 마구 찼다 / 세게 찼다 / 영감 손자 때려봐 /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때렸다 / 영감이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다 / 이놈의 빨갱이 노인아 / 세게 쳐 / 세게 쳤다 /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손자 / 울면서 / 서로 따귀를 쳤다 / 빨갱이 할아버지가 / 빨갱이 손자를 치고 / 빨갱이 손자가 빨갱이 할아버지를 쳤다 / 이게 바로 빨갱이 놀이다 봐라 / 그 뒤 총소리가 났다 / 할아버지 임차순과 / 손자 임경표 / 더 이상 / 서로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 총소리 뒤 / 제주도 가마귀들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200~202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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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posted by Belle〃♬ 2007. 8. 11. 22:59
7. 서청의 착취와 '민보단 강요'

여순사건 직후 48년 11~12월 두 달 사이에 최소한 1천 명 이상의 서북쳥년회 단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으로 급히 옷을 갈아입고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일엔 이승만이 앞장섰다. 미군의 48년 12월 6일자 보고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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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부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 서북청년단원들이 한국군에 6천500명, 국립경찰에 1천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한 지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 간의 상호합의에 따라, 서북청년회는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단 경위 1명, 200명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

이승만은 12월 10일 서북청년회 총회에 참석해 "제주도 4.3사태와 여수,순천 반란사태로 전국이 초비상사태로 돌입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회를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사상이 건전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며 서청의 제주 파견을 앞장서서 독려했는데, 여기엔 미군도 가세했다. 미군 보고서는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를 지원하게 된 것은 몇몇 미군 장교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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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 단원들은 '특별 중대(elite company)'라는 특수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이들에겐 군 내부의 '반대자 색출' 이라는 헌병 기능까지 부여되었다. 그러나 정작 줘야 할 건 주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서청 대원들을 대거 경찰이나 군인으로 내려보내면서 월급이나 보급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현지 조달하라는 식으로 내몰았으며, "제주도민들은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다. 대부분이 빨갱이 물이 들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상이 건전한 서청이 이곳을 진압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입시켰다.

서청 단원들은 3.1사건 직후부터 제주에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그때부터 경찰과 더불어 민중을 착취하는 길로 들어섰다. 김종민에 따르면,

"당초 서청은 민간인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처음엔 주로 엿장수를 하다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이승만의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로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은 총살되었다. 서청의 위세는 너무도 커서 제주 출신은 경찰조차 꼼짝 못했다."

이승만 정권의 의도된 서청의 착취행위 조장의 결과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서청의 악탈행위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그걸 감내하든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구도로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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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사람 피쟁이(백정) 서북청년단들, 다 사람백정이지, ...... 순 엿장수나 하던 무식한 것들이었지. ...... 매일 소 한마리 말 한마리 잡으라 하고, 조금만 거슬리면 잡아다가 총대가리로 때리고, 죽였지. ...... 시계 달라고 해서 안 주면 죽여 버렸지. 낮에는 일 시키고 밤에는 대총 들고 보초 서고 ...... 징그럽고 억울하게 그 빌어먹을 놈들의 종노릇 하며 생명까지 바치며 산 우리들. 우리들끼리 올며 분노하며 한탄하며 살았지. 산목숨으로 산 게 아니었지. 지옥살이 하듯 죽지못해 살았지. ...... 그래 살기 위해 싸우기 위해 산으로 갔지."

제주도민에 대한 착취엔 '민보단 강요'까지 가세하였다. 5.10선거에서 맹활약한 향보단은 48년 5월 22일에 해산되었지만, 이는 6월 민보단(民保團)으로 부활하였다. 제주도에선 8월 11일에 민보단이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경찰의 외곽조직으로 군경 진압작전에 동원되었다. 보초를 서는 일과 더불어 토벌작전시 죽창 등의 무기를 들고 군인이나 경찰관보다 앞서가는 총알받이 역할을 해야 했다.

제주 민보단은 5만명 규모였는데, 소집할 청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중엔 남녀노소 모두에게 민보단의 이름 아래 동원 의무가 부여되었다. 민보단에 대한 미군의 한심한 보고서는 무지가 지나쳐 완전히 조롱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미군 보고서 49년 4월 1일자는 "제주도 남자들은 농사일보다는 보초를 서거나 토벌전에 나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기록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97~199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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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lle〃♬ 2007. 8. 10. 23:43
6. 미군이 제안한 '초토화 작전'

앞서 지적했듯이, 4.3항쟁에 대한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군대, 경찰, 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명하면서 민중을 '사냥' 해야 할 인간 이하의 '동물적 대상' 으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인간 사냥' 으로 인해 빚어진 가장 참혹한 희생은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발생하였다. 이 기간 중 160여개 마을 가운데 130여개 마을의 수만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8월 24일 한미(韓美) 사이에 맺어진 '한미 군사안전 잠정협정' 에 따라 주한미군이 한국군의 작전권을 갖게 되었다. 이런 큰 변화가 있었으니 그 이전에 벌어진 학살극도 이젠 달라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물론 달라지긴 했다. 학살은 더욱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다. 6일 만인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 핵심은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 기간 중 전 도의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此)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그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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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토벌대는 이 또래의 아이들까지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게 바로 그 악명 높은 '초토화 작전' 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겠다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미군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4.3 발발 직후 제9연대장으로서 무장대와 평화협상을 추진했던 김익렬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군정장관 윌리엄 딘 장군의 정치고문이 제주도 폭동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면서, 이를 거절하는 자신에게 작전 수행 후 미국행 알선과 10만달러의 돈을 주겠다며 유혹했다고 밝혔다.

김익렬의 밑에서 9연대 정보참모로 일했던 이윤락도 "CIC(방첩대) 소령이 김익렬 연대장과 나에게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지대를 적성(敵性) 지역으로 간주, 토벌하라고 명령했다"고 증언했다.

바로 이 초토화 작전이 5개월 만에 실행된 것이었다. 이 작전에 따라 10월 18일 제주 해안이 봉쇄되었다. 10월 19일에 제주에 파병될 예정이던 여수 주둔 14연대 1개 대대는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제5여단장으로서 제주도 경비사령부 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던 대령 김상겸이 5여단 예하부대인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파면되었다. 그래서 송요찬이 제주도 경비사령관까지 맡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계엄령은 12월 31일에 해제되지만, 선포부터가 불법이었다. 이 당시 군내엔 계엄법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제주는 법의 지배를 받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중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총살하는 초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아니 '인간 사냥' 이었다. 무슨 항거를 해야 '진압' 이 아닌가.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95~197쪽 그대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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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elle〃♬ 2007. 8. 4. 22:32
7. 숙군(肅軍) 작업과 박정희 체포

여순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숙군(肅軍)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군법무관 김완용을 불러 "한 달 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아 죽이고 오라"면서 숙군 작업을 몰아붙였다. 남로당 세력뿐만 아니라 광복군 계열까지 제거대상으로 삼은 숙군 작업은 48년 10월부터 49년 7월까지 진행돼 전 군(軍)의 약 5%에 달하는 4천749명을 숙청하였다. 이 중 2천 명 이상이 총살형을 당했다. 초급장교와 하사관의 경우엔 전체의 3분의 1이 체포, 구금, 처형, 또는 제대당했다. 군 내부의 반공이념교육도 더욱 강화돼, 48년 11월 29일 국방부 내에 반공이념교육을 목적으로 한 정치국(후에 정훈국으로 개칭)이 설치되었다.

숙군은 증거주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많은 무리가 있었다.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아내는 식이었고, 다른 좌익을 대라고 또 고문을 가하는 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총살을 당하는 마당에서도 애국가를 부르거나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며 죽어간 이들도 있었다. 이런 식의 고문수사를 통한 숙군 작업에 탁월한 면을 보여 나중에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특무부대장이 된 인물이 바로 김창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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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군 작업의 와중에서 48년 11월 11일 소령 박정희도 체포되었다. 42년 만주군관학교 졸업, 44년 4월 일본 육사 졸업 후에 44년 7월 일본 만주군 소위로 부임한 박정희는 해방 후 베이징으로 가서 광복군이 되었다가 46년 12월 경비사관학교 2기를 졸업했는데, 여순사건이 터지자 우습게도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되었다. 우습다는 건 그가 남로당 프락치였기 때문이다.

만주군에서 광복군으로 변신했던 박정희는 좌익에서 우익으로 또 한번 변신을 꿈꾸고 군부 안의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 수사에 적극 협력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은 것이다. 군내 남로당의 조직표까지 그려서 제출했다. 박정희는 일단 기소돼 사형을 구형받았지만, 남로당원 색출의 공로를 인정받은 데다 그의 만주군 선배들이 적극 구명운동에 나서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반공(反共) 국가'를 완성시키기 위한 계기로 간주하여 이후 전사회의 병영화를 위한 방안들을 계속 내놓게 된다. 한국 사회가 반공을 국교(國敎)로 삼다시피 하는 외길로만 내달리는 동안 여순사건은 악명(惡名)과 오명(汚名)을 뒤집어쓴 채 피해자들은 숨을 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여순사건이 거의 진압되어 가던 9월 29일 내란행위특별조치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제출되었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사회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법은 공산주의를 불법화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와 처벌 규정이 아주 모호해서 정권이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데에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11월 14일자 사설 <국가보안법을 배격함>은 국가보안법이 "크게 우려할 악법이 될 것"이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6~190쪽
posted by Belle〃♬ 2007. 8. 4. 00:04
6. 사망자 2천 600명

여순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끔찍했다.

여수 지역 국회의원 황명규는 정부의 진압과정에서 여수에서는 3천 400여 가옥이 불에 탔고, 약 2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여수에 진압군이 들어온 26일, 그리고 27일 불이 났을 때 소방서장이 불을 끄려고 사람들을 모으자 5연대장 김종원이 총대로 서장을 구타하여 쫓아냈다는 증언은 이 불이 진압군의 의도적인 방화였을 가능성을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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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와중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참혹한 모습 I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여순사건으로 인해 토벌군은 141명이 사망, 263명이 실종, 391명이 반란군 측에 합류했으며, 반란군은 821명이 사망했고 2천 860명이 체포되었다. 48년 11월 말 미군 소식통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약 1만 7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반란군에 참가했다는 혐의를 받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그들 중 866명이 사형언도를 받았다.

전라남도 보건후생국은 11월 1일 여수에서는 약 1천 300명의 시민이 사망하고 약 900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37억 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으며, 순천에서는 1천 135명이 사망하고 103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천350만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고 보고했다.

보성(80명), 광양(57명), 구례(30명), 고흥(26명), 곡성(6명) 등에서도 약 2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여순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2천600명이 넘었고, 중경상자는 약 1천500명, 행방불명이 825명이었다.

『한국전쟁사』를 필두로 한 공식 기록물들은 그 수많은 사망자들을 "인민재판 등 폭도들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인민재판이란 구경꾼 앞에서 하는 재판인데 그걸 봤다는 증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무얼 말하는가. 10월 26일 진압작전 이전까지 반란군 치하에서 희생된 사람은 경찰관 74명과 우익인사 등 민간인 16명뿐이라는 설과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모두 155명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 만약 반란군이나 폭도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그 유족은 군경 유가족에 준한 대접을 받을 수 있고 부역자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왜 지금까지 침묵만 지키고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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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와중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참혹한 모습 II



미국은 여순사건에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고문단장 준장 로버츠는 진압군 측에 무기, 탄약, 휘발유, 식량 등을 무제한 공급하였다. 고문단을 대표하는 작전 책임자였던 대위 짐 하우스만은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미 국방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미국 측은 여순사건의 진압이 '성공적' 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군의 작전 능력과 순발력을 과시한 계기"가 되었고 "(경찰 보조 병력으로 산돼지 몰이나 하던) 한국군 현대화의 시발"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건 발생 사흘째인 10월 21일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은 기자회견에서 사실상 김구를 겨냥하여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운 몰락한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서 벌인 정치적 음모"라고 주장했으며, 그래서 시중에는 여순반란에 김구의 선동이 작용하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주한미군 정보참모부는 김구가 반란을 선동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기록하면서 그 근거로 ① 경비대 내에 김구의 추종자들이 상당하며, 반란의 공격 목표가 현 정부라는 점, ② 사건 직전 김구가 전남 광주를 방문했다는 점, ③ 이범석이 여순반란에 우익들이 개입했다고 발표한 점 등을 들었다. 김구는 10월 27일 기자회견에서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3~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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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승만 정권의 여론 조작

토벌군과 정부는 허위사실까지 유포하여 '여순 지역 죽이기'에 나섰다. 어린 여학생들이 총을 들고 싸웠으먀 국군에게 '오빠!' 하고 달려가서 치마 속에서 총을 꺼내 국군을 죽였다는 이야기들이었다. 전혀 사실무근이었지만 널리 유포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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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이 주민들을 초등학교로 이송중인 모습

소령 함병선은 어린 여학생이 전봇대 뒤에 숨어 자신을 총으로 쏘았는데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비켜갔다는 증언까지 남겼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여학생을 훈계해서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당시 여수에서 군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극의 잔인성에 비추어 볼 때에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바로 이런 식의 이야기와 소문이 정부의 강경 대응책을 내놓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8년 11월 4일 여순사건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앞잡이'가 되었고, 여학생들도 심하게 반란군에 가담하였다고 발표해 여론을 호도하였다.

엄격하게 동제된 신문들에 의한 여론조작은, 학살은 은폐하고 '미담(美談)' 수준의 이야기만 양산했다. 임종명이 이 시기 신문기사들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처음에는 "양민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작전" 대신 "소극적인 작전"도 마다 않았던 "관군"이 시내에 돌입해서는 "먼저 식량창고를 탈취하여 시민의 식량을 확보"하고 "서(西)국민학교나 여수국민학교에 수용"된 "피난민에게는 주먹밥을 나누어 주"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국군"의 모습을 재현했으며, "국군"은 "인명을 보호"하는 수호천사로 묘사되었다.

또 문교부는 문인들을 현지에 파견해 시찰을 시킨 다음 정부에 유리한 글을 쓰게 했다. 박종화, 이헌구, 정비석, 최영수, 김송 등은 서울역에서 문교부장관의 전송을 받으면서 기차를 탔다. 『동아일보』 48년 11월 24일자에는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한 작전장교의 언급을 박종화가 윤색하여 정리한 글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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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에 희생된 경찰관&의용단원

"우리 민족은 이렇게 나가야 하고 이렇게 싸워야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고 이렇게 죽어야 하는 것을! 확고부동하게 조직적으로 체계 있게 머리 속에 깊이 넣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공연한 미국식 민주주의, 미국식 자유주의가 이런한 혼란을 일으켜 놓은 것입니다. 이 악랄한 세계 제패의 공산주의자의 사상은 학교뿐 아니라 군인과 사회 속 각층 각 방면에 침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불행한 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입니다. 정부에서는 우리 민족이 가져야 할 국시를 하루바삐 명확하게 세워서 3천만 전민족의 머리 속에 깊이깊이 뿌리박고 일어나도록 교육하고 선전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전역에 게엄령을 확대했으며, 게엄령은 다음해 49년 2월 5일까지 지속되었다. 정부는 반란을 일으킨 14연대를 연상케 한다고 해서 전국적으로 각 건물에서 4호실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고, 토벌작전에 지장이 있다고 3개월 동안 여수-서울 간 열차를 없애 버리고 전주-서울 간만을 오가게 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1~183쪽

posted by Belle〃♬ 2007. 7. 31. 22:57
4. '손가락총'과 김종원의 참수형

반란군에 가담했던 사람의 선별 작업은 마구잡이식이었다. 예컨대, 당시 가담자들이 신발공장에서 '찌까다비'(일할 때 신는 신발)를 가져다 신었다는 소문 하나만 듣고 진압군은 그 신발을 신은 청년은 무조건 사살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청년들이 학생복을 입은 죄로, 머리를 군대식으로 짧게 깎은 죄로, 국방색 런닝셔츠를 입은 죄로 살해되었다.

'손가락총'도 동원되었다. 당시 여수군청 직원이었던 김계유는 "세 곳에 모인 시민들에 대하여도 살아남은 경찰관이나 우익진영 요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소위 '심사' 라는 것을 했는데, 시민들 중에 가담자가 눈에 띄면 뒤따른 군경에게 '저 사람' 하고 손가락질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즉결처분장으로 끌려가는 판이니 누구나 산목숨이라고 할 수 없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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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들에 의하여 여수서초등학교 교정으로 붇찹혀 온 여수시민 청장년들이 자기 집들이 불타는 것을 보고도 속수무책으로 잡혀있는 광경. 반란 동조 혐의자로 판명되면, 이곳 학교 뒤 교정에서 즉결처형(참수&총살) 되었다. 오른쪽 대열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부역 혐의자들로서, 이들 중 89명이 11월 1일 처형되었다.

그 손가락질은 곧 총살 대상을 지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손가락총'이었다. 홍영기는 "지역공동체 성원 간에 자행된 '손가락총'은 인간성 말살과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심사' 과정에서 '손가락총' 이라는 말이 유행하였으며 중상모략이 난무했었다. 이로 말미암아 무고한 희생자가 더욱 많아졌고, 그 희생의 주체가 누구인지 애매한 경우가 많았음은 물론이다"라고 말했다.

토벌군이 작전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조작과 반란군을 놓친 것에 대한 분풀이의 잔인성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5연대 지휘관인 대위 김종원의 행태였다. 5연대가 상륙작전을 하면서 마구 쏘아댄 박격포탄에 반란군이 아닌 12연대 수색대가 맞아 중대장과 하사관 1명이 전사했다. 그 어이없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김종원은 반란군을 찾아 돌산섬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수색했지만 허탕을 쳤다.

독이 오른 김종원은 아무 증거도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군내리에서 3명, 남면 안도에서 20여 명을 죽이고, 중앙국민학교에 자리잡은 부대로 돌아와 붙잡혀 온 청년들을 보고 "이놈들에게 칼 시험이나 해 보겠다"며 들고 다니던 일본도를 빼들고 한 청년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 청년이 중상을 입고도 피를 흘리며 다른 청년들 뒤로 몸을 피하자 김종원은 계속 칼을 휘둘러 7명의 젊은이를 모두 죽였다. 희대의 즉결 참수(斬首)였던 것이다. 김종원은 6.25 때 '백두산 호랑이' 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바로 그런 인물이 유능한 군인이나 경찰로 대접받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80~181쪽